[을지면옥] 대를 잇는 전통 평양냉면의 명가

 

을지로 입정동

 

학창시절 때 상상했던 21세기의 서울 한복판 모습은 영화의 한장면까지는 아니더라도 빼곡한 고층빌딩이 숲을 이룬 복잡한 도시였습니다. 그후 30년 가까이 흐른 지금, 서울시 중구를 비롯한 을지로와 청계천 주변은 여전히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고 이곳을 중심으로 모여있는 전통 평양냉면의 명가들은 여전히 분주히 영업하고 있습니다. 세월은 흘렀지만, 대를 잇는 명가는 달라진 게 없었다는 것.

 

어릴 때부터 저는 아버지 손을 잡고 을지로와 종로 근방의 맛집이란 맛집은 전부 돌았습니다. 나름 미식가였던 아버지는 서울 중심에서 이름 난 곳을 데려가주었습니다. 어린 제 입에는 맞지 않은 음식이지만, 그때는 멋모르고 먹었지요. 당시에는 '맛집'이라는 단어가 없었으니 그냥 'OOO가 맛있기로 유명한 집' 정도입니다. 그중에는 을지면옥도 있었지만, 어렸을 때 맛 본 냉면 맛이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있을 리 없습니다.

 

그래서 을지면옥은 제 머리가 크고나서 사실상 처음으로 찾는 음식점이라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여전히 너저분하고 허름한 골목에 있는 식당. 수많은 간판속에 묻혀 있으니 잘 찾아야 합니다.

 

 

대를 잇는 전통 평양냉면의 명가는 허름하다 못해 초라해 보였다.

 

페인트로 칠한 을지면옥이 전부인 입구. 반가운 마음에 발을 디디면, 옛 상가 건물 느낌의 어둡고 좁은 통로를 걸어들어가야 본 음식점이 나옵니다.

 

 

흰 벽에 달린 선풍기, 그 아래 찢는 달력. 인테리어 역시 예스럽습니다. 때는 휴일 점심 시간으로는 조금 늦은 시각이었지만, 여전히 손님은 많네요. 냉면 수요가 폭발적으로 몰리는 여름이 지난 터라 줄 서가며 먹는 진풍경은 없었습니다.

 

 

차림표는 냉면, 비빔냉면, 수육. 그 옆에는 원산지 표기가 되어 있는데 공급처까지 적어 둔 게 인상적입니다. 고춧가루부터 시작해 모든 재료를 국내산으로 쓰는 것은 다른 평양냉면가와 다를 게 없었습니다.

 

 

메밀 면수

 

냉면에 일가견이 있는 미식가들은 흔히 평양냉면의 사대 천왕이니 오대 천왕이니 하며 몇몇 식당을 꼽곤 합니다. 제가 주로 가는 장충동 평양면옥(어제도 갔다왔지만), 우래옥을 비롯해 이곳 을지냉면과 한뿌리인 필동면옥까지. 이들 음식점의 특징은 다른 일반 냉면집에서 내주는 조미료 육수가 아닌 메밀 면수를 낸 다는 점입니다.

 

면수를 담는 용기 두께가 인상적이지요. 양손으로 잡으면 손을 녹일 수 있는 손난로가 되면서 한입 들이켰을 때 느껴지는 맹맹한듯 구수함. 식전 입가심으로 이만한 것도 없습니다만, 전통의 평양냉면 명가가 아니라면 이렇게 면을 삶아서 나온 물 조차도 맛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 따듯한 면수는 추운날 진가를 돋보입니다. 시린 손으로 컵을 잡고선 호로록 하며 들이마시는 면수는 느껴본 이들만이 아는 맛일 겁니다. 따듯한 면수로 데워진 위장에 차가운 냉면 육수가 들어오면 속이 알싸해지죠.  

 

 

기본찬은 김치와 무절임

 

평가로는 이곳이 신김치가 제법 맛있다던데 이날 나온 김치는 좀 아니었습니다. 한 마디로 제대로 익지 못해 쉰내가 나는 (흔히 이걸 두고 김치가 미쳤다라고 표현하지요.) 그런 맛이네요.

 

 

비빔냉면 10,000원

 

먼저 을지면옥이 자랑하는 물냉면을 맛보기 전에 일행이 시킨 비빔냉면을 조금 덜어서 맛을 봤습니다. 그 맛이 요즘 사람들의 입맛에는 익숙지 않은 맛이더군요. 양념 종류가 여느 집과 달리 간장이 베이스입니다. 흔히 고추장, 과일(혹은 설탕)으로 맛을 낸 맛이 아닌 집 간장에 고춧가루를 섞어 만든 느낌이 났죠.

 

그러고보니 옛날에 어머니가 해주셨던 비빔국수와 맛이 비슷하네요. 간장이 주체가 되는 양념장을 면발에 끼얹어 훌훌 말아먹는 식인데 사실고 달고 맵고 자극적인 입맛에 길든 이들이 이 맛을 보면 무슨 비빔냉면 맛이 이런가? 싶을 겁니다. 저 역시 이 맛을 알기에는 그간 세월이 많이 변했고 제 입맛도 변해버렸군요. 그래서 저는 맛에 대한 만족보다는 추억이 떠오르는 반가움으로 먹었습니다.  

 

 

을지면옥의 상징인 평양냉면 10,000원

 

고춧가루를 팍팍 뿌리고 잘게 썬 파를 고명으로 올리는 냉면은 을지면옥과 필동면옥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이 두 집은 한집안의 자매가 운영 중인데요. 그 뿌리는 6.25 사변 때 남한으로 내려온 김경필 할머니에 있습니다. 그 분은 1969년 경기도 연천에서 처음으로 평양냉면집을 열었습니다.

 

그 뒤 의정부로 자리를 옮겨 의정부 평양면옥을 운영 중이고 그분의 두 딸이 오늘날 을지면옥과 필동면옥을 운영 중에 있습니다. 그러니 꾸미나 육수 맛에서나 여러 모로 닮아있지만, 미식가들 사이에서는 평가가 엇갈리는 편입니다.

 

 

삶은 달걀을 치우니 소고기 수육 한 점에 돼지고기 수육 두 점이 올려졌습니다. 냉면을 먹는 방법은 기호마다 다를 것입니다. 보통은 여기서 식초와 겨자를 타서 먹지만, 저는 아무것도 넣지 않고 먹는 편입니다. 메밀의 구수함과 육수의 은은함을 느끼는데 식초와 겨자가 맛을 헤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저도 2/3 가량 먹고 나면 그제야 식초와 겨자를 조금 타서 남아 있는 것을 입에다 훌훌 털어버립니다. 물론, 이것은 평양냉면을 먹는 저만의 방법일 테니 정답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을지면옥의 냉면 맛은 제 기억속에서 사라진 맛입니다. 그러니 아무런 비교 거리 없이 맛을 봅니다. 그런데 육수가 좀 독특하게 다가오네요. 첫 술 뜨자마자 혀가 쨍그랑쨍그랑 부딧히는 듯 합니다. 혹시 이보다 더 맹맹한 평양면옥의 냉면 맛을 안다면 더욱 그렇게 느껴질는지도 모릅니다. 우래옥은 진한 육향이 평양면옥은 은은함이, 각자 육수 맛의 포인트를 두고 포지션을 긋고 있지만, 을지면옥의 포지션은 맹맹함 속에서도 나로 육향을 보여주려는 속내에서 간간한 '간 맞춤'이 한몫하는 듯 하였습니다. 간의 세기를 더해 육향을 두드러지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입에 넣으면 살짝 짭짤한 맛이 납니다. 확실히 이 맛은 다른 평양냉면가의 육수와 선을 긋는 포지션이었습니다.

 

그런데 엷은 돼지 냄새가 육수에 밴 듯한 느낌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돼지 편육을 맛 보는데 어쩌면 여기서 문제가 생긴 듯하네요. 을지면옥은 돼지 편육이 맛있기로 소문이 자자했지만, 이날 만큼은 누린내가 좀 났습니다. 그런 편육이 육수에 닿으면서 국물에 밴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을지면옥 찾아오는 길 : 아래 지도 참조

네비 주소 : 서울 중구 입정동 177-1

영업 시간 : 11:00~21:00 / 명절 당일 1,3,5주 일요일 휴무

주차 시설 : 없음

문의 : 02-2266-7052

 

면발은 다른 평양냉면 집보다 가는 편이었고 메밀 함량도 그리 높은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이집은 나름대로의 점성(쫄깃함의 정도를 맞추기 위한)을 위해 메밀 함량을 낮추고 밀가루 비율을 높였을 것입니다. 다른 평양냉면가에서는 8 : 2, 9 : 1, 혹은 10 : 0과 같은 순면을 팔기도 하지만, 이 집은 그보다 낮은 7 : 3이 아닌가 하는 예상을 해봅니다.

 

평양냉면은 흔히 겨울 음식이라고 합니다. 여름에만 냉면을 찾는 이들에게는 갸우뚱할지도 모르지만, 재료의 제철이 철저히 겨울에 맞춰져 있으므로 겨울 음식이라 하는 건 당연하겠지요. 여기에는 주재료인 메밀과 무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곡물이든 수확과 탈곡이 오래되지 않아야 향이 살 것입니다.

 

이러한 곡물에 '햅'이란 말을 붙여 햅쌀 등으로 불리곤 합니다만, 메밀도 다른 곡물과 마찬가지로 가을에 수확하니 늦가을부터 겨울에는 탈곡을

거친 햅메밀이 구수한 향을 뽑낼 시기입니다. 평양냉면가 중에는 육수에는 동치미 국물을 섞어 내기도 합니다. 동치미의 주재료인 무 역시 가을에 수확하여 겨울에 제철을 맞게 되니 11월이면 다들 동치미를 담그지 않습니까.

 

무 상태에 따라 동치미도 맛이 다르니 겨울에 담근 맛과 봄에 담근 맛은 꽤 큰 차이일 것입니다. 그러니 동치미 국물을 섞어서 만든 집들은 계절에 따라 냉면 육수 맛에도 미묘한 맛의 차이가 있을 겁니다. (대체로 신맛에서 차이가 남)

 

그래서 제대로 냉면 맛을 즐기고자 할 때는 함박눈에 펑펑 쏟아지는 한겨울에 찾기도 합니다. 이제 곧 그러한 시기를 앞두고 있습니다. 꽁꽁 언 손으로 두툼한 컵을 손난로처럼 쥐고 있다가 따근한 면수를 들이킨 후 찬 육수로 속을 어루고 달래면 어떨까 싶습니다. 여름에 먹던 냉면 맛과는 또 다른 감흥이 있을 거라 봅니다.

 

어제는 오랜만에 가족 외식을 하러 장충동으로 나왔습니다. 갑자기 그 집의 평양만두가 먹고 싶어졌기 때문인데요. 셋이서 만두와 냉면으로 푸짐히 먹고 돌아가는 길에는 태극당에 들러 그 유명한 모나카를 하나씩 입에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5만 원 가까이 나왔는데요. 서울 바닥에서 그 돈이면 허투른 음식을 먹고 나올 수도 있지만, 자그마한 선택 여하에 따라 모처럼의 휴일 가족 외식이 후회 아닌 달콤한 호사를 누릴 수도 있구나란 걸 새삼 느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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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입질의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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