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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피고 늦게 지는 제주의 억새 풍경은 개화시기가 10월로 되어 있지만, 올해의 경우 11월에 절정을 맞고 있습니다. 산굼부리처럼 사유지에다 억새 군락을 인위적으로 조성해 관리한 다음 입장료를 받고 관광객을 유치하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의 오름은 사람의 손을 타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속살을 보여줄 때가 많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아끈다랑쉬 오름인데요.
제주도에는 여러 오름이 있지만, 이렇게 작고 앙증맞은 오름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오르는 데 있어 부담이 없는 아담한 친구입니다. 그 작고 앙증맞음에 큰 기대 없이 올라가면 생각보다 넓게 펼쳐진 억새 풍경에 매료되어 "이런 곳이 있었나?" 라고 말하는 곳이지요. 아끈다랑쉬 오름은 전형적인 기생 화산이지만, 높이가 낮아 몸이 조금 불편한 어르신이나 아이에게도 부담 없는 곳입니다.
용눈이 오름에서 바라본 아끈다랑쉬 오름
제주의 동북 일대는 수많은 오름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직한 모습을 보이는 곳은 다랑쉬 오름이지요. 이 일대에서는 가장 우뚝 선 모습으로 맏형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그 옆에는 막내인 아끈다랑쉬 오름이 수줍은 듯 버티고 서 있지요. 여기서 '아끈'은 '작다'라는 의미로 새끼다랑쉬 오름으로 불리기도 한답니다.
아끈다랑쉬 오름으로 가는 길
올라가던 중 잎사귀에 붙여 놓은 껌을 발견, 이러지는 말자
아끈다랑쉬 오름에서 바라본 다랑쉬 오름
아끈다랑쉬 오름에서 바라본 억새 군락
#. 정상까지 15분, 누구나 오르기 쉽지만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풍경
특별히 어르신을 모시고 가거나 아이들과 함께한다면, 아끈다랑쉬 오름이 제주도 여행의 한 코스를 담당해도 될 것 같습니다. 높이가 고작 198m, 둘레는 1.454m로 가운데 움푹 들어간 분화구를 중심으로 한 바퀴 도는데 한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그 아담함 때문에 자칫 저평가 받을 수도 있지만, 막상 올라가 보면 지상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꿈에서나 볼 법한 황홀경이 펼쳐져 어안을 벙벙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살랑살랑 바람에 흩날리는 억새는 햇빛에 반사되면서 뽀송뽀송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데요. 그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노라면 기분이 살짝 몽롱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꿈속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도 들게 합니다. 사람 키를 넘는 억새에 완전히 둘러싸여 걷다 보면 절로 힐링이 되는 곳.
그런 아끈다랑쉬 오름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드물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오름이 아닌 근처의 '다랑쉬 마을'과 '다랑쉬 굴' 이 있었는데 제주 4.3 사건으로 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후 폐동되었다고 해요. 그러한 민족의 비극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친구가 바로 다랑쉬 오름과 아끈다랑쉬 오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빛내림을 받고 있는 아끈다랑쉬 오름
#. 햇빛과의 숨바꼭질로 원하는 장면을 담지는 못했지만
흐드러지게 핀 억새는 '빛'을 받을 때 진정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폭신하면서 솜사탕 같은 속살은 햇빛을 받을 때 더욱 빛을 발하는데요. 억새의 포근한 속살을 담기 위해 가장 좋은 시간대는 태양의 고도가 낮은 아침이나 혹은 저녁일 겁니다. 이때는 빛의 스펙트럼이 높아 역광을 앉고 찍으면 황금색으로 물든 벌판 위에 흐드러지게 핀 억새를 담을 수 있을 겁니다.
이날은 아쉽게도 짙은 구름이 끼어 원하는 장면을 얻지 못했어요. 내내 먹구름에 가려져 있다 오름을 떠나려 하자 그제야 한시적으로 하늘이 뚫리는 장면입니다." 조금만 늦게 올걸" 하고 후회하면서 아쉬운 속내를 드러내고 말았지만, 그래서 저는 아끈다랑쉬 오름에게 '다음에 다시 만나자!' 라며 기약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오름을 통째로 전세 내며 걷고 있었다.
다랑쉬 오름과 아끈다랑쉬 오름 주차장
오름을 떠나려 하자 그제야 이곳의 풀들이 햇빛이 받으며 제 색깔을 내기 시작한다. 다음을 기약할 수 밖에
아끈다랑쉬 오름을 떠날 때 나눈 마지막 인사
#. 마음속 교향곡을 울러 퍼지게 했던 황홀한 억새 풍경
인위적인 배열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우리를 반겨 주었던 아끈 다랑쉬의 억새밭. 사람이 다닐 수 있는 둘레길도 좋지만, 분화구로 이어지는 작은 샛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내자신은 어느새 자연에 파묻혀 있음을 알게 해줍니다. 떨어져 있는 일행의 머리카락이 보일락 말랑할 정도로 푹 파묻혔고 주위를 둘러봐도 억새뿐인 이곳에서 심호흡을 하고 있으면 나 자신도 모르게 어디선가 들었던 교향곡이 울려 퍼집니다.
그것은 영화 OST일 수도 있고, 교향곡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으로 음악감상을 하다 보면 어느새 볼륨은 커져 있고. 이제는 끄고 싶어도 쉬이 끌 수 없을 정도로 울러 퍼지고 있으니 다소 시간이 지체된 탓에 머리를 흔들며 떨쳐내려고 해보지만, 여전히 내 머릿속을 적시던 음악이 몸과 귀에 붙어 잔향을 내고 있습니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주변을 살핍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울러 퍼졌던 음악은 서서히 진정을 찾으며 메아리칩니다. 사라지는 음악 소리 뒤에는 결국 바람 소리 만이 남습니다. "빨리 와!"하는 일행의 목소리와 함께 말이죠. 잠시였지만, 이 오름에는 우리 가족 외에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오름을 통째로 빌린 셈입니다.
우리가 오름에서 퇴장할 때 저 아래는 하나둘씩 짝지어 들어오는 관광객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어쩜 타이밍도 이렇게 절묘할 수 있을까? 아마도 아끈다랑쉬 오름은 자기 스스로가 '명품관'임을 아는 것 같습니다. 쇼핑하는 데 있어 북적대지 않게끔 적당한 인원만 허용하고, 나가면 다시 적당한 인원만 들여보내는 ^^ 그래서 아끈다랑쉬는 제주 오름의 '명품관'이라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 추신 : 낮은 언덕이지만, 초입에 경사진 부분은 새끼줄이 터졌는지 미끄럼 방지 기능을 못 해 여러 번 미끄러질 뻔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보수 작업이 필요해 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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