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고야도 처음, 료칸이란 숙박 환경도 처음이지만, 가장 기대되는 것 중 하나는 이곳에서 접하는 첫 저녁 식사일 것입니다. 흔히 '가이세키 정식'을 떠올리는 료칸의 저녁 식사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제 머리속 기억 어딘가에 있었는데 아무래도 미디어의 영향이 있었던 듯합니다. 그렇게 한번 뿌리를 내린 기억은 새로운 경험을 받아들일 때까지 고정화된 관념으로 자리 잡으면서 저녁을 서서 먹게 될 것이란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온천을 마치고 딸에게 입힐 유카타를 주문했습니다. 아직 두 돌도 안 된 아기라 사이즈가 없을 줄 알았는데 마침 몸에 꼭 맞는 한 벌이 있었습니다. 

 

 

료칸 직원의 90도 인사를 받으며 2층 식당으로 들어갑니다. 들어가자마자 느껴지는 기운이랄까요. 기모노 탓인지 분위기가 살짝 엄숙해 보입니다. 그런데 제가 알던 료칸의 가이세키 정식을 먹을 분위기가 아닙니다. 테이블에는 마땅히 놓여야 할 의자도 보이지 않고요. 

 

 

커다란 테이블에 몇 가지 음식이 차려지고 삼삼오오 둘러서서 맥주잔을 맞대며 담소를 나누는 서양식 파티 문화가 조금 엿보이는 그런 형태입니다. 식사 시간을 5분가량 넘겨서 왔더니 시간을 칼 같이 지키는 일본인 손님(이곳 료칸은 외국인 관광객보다 일본인이 주로 이용한다고 함)들이 몇몇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고, 나머지는 제 동생과 지인들입니다. 남는 자리에 선택의 여지가 없어 우리는 일본인 손님과 합석합니다.

 

이날은 동생이 몸담은 여행사 종사자들과 일본 현지 종사자들과의 친목회라 특별히 파티 형식으로 진행된 것입니다. 여기 계신 손님들은 대부분 여행업 종사자와 가족인데 인원이 많으니 누가 누군지는 일일이 알기 어렵고 그냥 적당히 합석해 말을 섞고 음식을 공유하는 자리입니다. 아무런 정보 없이 온 터라 조금은 당황스러웠지만, 료칸의 일반적인 저녁 식사가 아니라는 점에서 특이해 보이기는 합니다. 아마 기대했던 가이세키 정식은 다음 날 저녁에 선보이겠지요.

 

 

테이블에 올려진 음식을 살핍니다. 먼저 도톰하게 썬 회가 눈에 띕니다. 구성은 참돔, 잿방어, 참치, 연어. 우리나라처럼 수조를 갖춘 횟집에서 만들어 오는 것이 아닌, 그날그날 받은 싱싱한 선어 횟감으로 가이세키 정식을 구성하고, 초밥을 쥡니다. 수조에 살려둔 고기가 아닌, 어업 현장에서 즉살해 가져온 것이므로 스트레스가 최소화되고 신선도가 살아있는 것. 그러니 료칸을 비롯한 대부분 식당은 빙장으로 운송된 횟감을 받아쓰면 그만이며, 피를 빼고 내장 제거 및 손질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불필요한 혈흔과 점액질을 칼과 도마에 묻힐 필요도 없습니다. 시스템이 체계화된 선어회는 횟감 손질 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위생적인 위험요소를 획기적으로 줄여주는 것이죠.

 

 

또 다른 접시에는 튀김류가 가득 들었습니다. 가라아게를 비롯해 새우, 돈까스, 생선까스, 고등어구이까지. 고등어는 노르웨이산을 사용했네요. 제주도 식당이라고 제주산 고등어를 사용하지 않듯이, 이곳도 철마다 공급량이 불안정한 재료를 사용하는 대신, 냉동 보관이 용이한 재료를 활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각종 초밥이 먹음직스럽습니다. 이날은 22개월 된 딸이 처음으로 회를 먹은 날. 그 전에는 낚시로 잡은 고기로 회를 쳐서 먹이기를 시도했지만, 빈번히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분위기의 힘이 큰 걸까요? 모두가 맛있게 먹는 분위기에서 생선살을 입에 대니 그간 굳게 닫았던 입을 연 것입니다.

 

 

한동안은 한 테이블에 정착해 식사하다가

 

 

슬슬 술이 들어가고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테이블을 돌아다니면서 이 사람 저 사람과 교류합니다. 우리 테이블에도 몇 분이 바뀌어 있네요.

 

 

안면도 모르는 분들과의 대면이 처음에는 조금 어색했지만, 술잔을 기울이면서 그런 분위기는 차차 사라져 갑니다. 일본어가 능숙하질 못하니 간단한 대화만 오가는 정도지만, 그래도 뭐 나쁘지 않습니다. 서서 갈비 대신 서서 먹는 초밥과 생선회이란 점도 특이하고. 맥주는 아사히生 병맥주를 계속해서 가져다 주는데 무제한으로 마실 수 있습니다. 술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환영할 만하겠지요.

 

 

한쪽 부스에서는 낮에 먹었던 꼴뚜기를 굽고 있습니다.

 

 

애매해 보이는 이 음식은 일본식 '사라다면' 정도인데 마요네즈 소스에 면을 비빈 것 같습니다.

 

 

한쪽에는 달걀말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이 궁금해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는데 이건 방법을 알아도 기술이 필요해 연습을 많이 해야겠군요.

 

 

층층이 쌓인 달걀말이.

 

 

가쯔오부시 향이 섞인 지극히 일본스러운 맛이지만, 입에서 녹아내리는 듯한 부드러움에 몇 번이고 갖다 먹게 됩니다. 

 

 

식사 분위기가 고조되자 여러 가지 마술쇼가 펼쳐지는데 평소에도 이런 공연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종류가 다양하진 않지만, 몇몇 칵테일도 원할 만큼 마실 수 있습니다.

 

 

가운데 활짝 웃고 계신 두 일본 여성은 손금을 전문적으로 봐주고 있어서 저도 부탁 좀 하였습니다. 제 손금이 일반적인 패턴이 아니어서 살짝 놀라시더라는. ^^ 결과는 좋은 소리만 한가득 들었습니다. 인생을 사는 데 있어서 몇 가지 주의사항과 피해야 할 것도 듣고요.

 

 

이 자리에서 단연 인기는 마술사 분.

 

 

 

 

어디서 본 적도 없는 카드 마술을 펼치는데 다들 입이 쩍 하고 벌어집니다.

 

 

카드와 몸이 혼연일체가 되는 이 장면에서 이 분의 평소 연습량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안 될 정도. 뭐랄까요. 외모상으로 풍기는 인상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고독한 마술사 느낌의 주인공이 만화에서 탁하고 튀어나온 것 같습니다. 캐릭터가 확실한 느낌이죠.

 

 

이번에는 동전 마술입니다. 한때 유튜브에서 상당한 조회수를 올린 거리 마술사의 동전 마술을 보는 듯한데.

 

 

마술 내용을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참여자가 순식간에 바보가 되는 그런 마술입니다. 마술사 주먹에서 참여자 주먹 속으로 순간 이동하는 동전 마술도 선보이고요. 앞뒤로 둘러싸여 있어 요리보고 저리 봐도 좀 처럼 트릭이 보이질 않습니다. 이런 건 현장에서 직접 봐야 하는데 사진으로만 전달하려니 도저히 어떻게 할 방법이 없군요. ^^;

 

 

식사는 이것으로 끝나나 싶었는데 난데없이 들이닥친 브라질의 여인들.

 

 

진담인지 농담인지는 모르겠지만, 브라질에서 날아온 팀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달려온 것이랍니다.

 

 

처음에는 조용하면서 단아한 일본풍의 식사로 시작했는데 갑자기 정열의 남미 춤판으로 변해버린 료칸의 첫 저녁 식사. 이런 분위기에서의 저의 예지력은 대부분 적중할 때가 많죠. 저는 맨 앞 중앙에 섰고, 저 여인과 눈을 몇 번 마주쳤습니다. 아마 이대로 가다가는 저 여인네가 제 손을 잡고 무대로 끌고 들어갈 것만 같습니다. 돌연 무대에 놓인 저는 모든 관중의 박수를 받으며 때아닌 춤판을 벌여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는 몸치인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시나리오입니다. 좋지 못한 예감을 직감한 저는 이쯤에서 자리를 비웠습니다. 중간에 곤히 잠들어버린 딸내미를 살피고 오겠다는 핑계를 대고 말입니다.

 

 

방에 들어오니 그 회의실 같았던 거실은 침실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 사이 직원분이 들어와 이불을 깔고 간 것으로 보입니다.

 

 

아래에 두꺼운 매트가 깔려 있어서 침대 못지않은 편안함이 마음에 듭니다. 방에서 십 여분 정도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식당에 갔더니 예상대로 한바탕 춤판이 일어난 모양입니다. 제 예감은 제대로 적중했는데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아내가 붙들려 나갔고 이어서 너나 할 것 없이 춤판을 벌이고 인간 기차놀이까지 즐겼다는 후문이(...)

 

※ 이어지는 나고야 료칸 여행기는 계속 업데이트 됩니다. 추석 명절 즐겁게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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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입질의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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