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허 낸 마라도 짜장면의 유쾌하지 않은 사실들

 

차이나타운을 방불케 하는 마라도 풍경

이곳은 대한민국 영토의 가장 남쪽 땅인 마라도.
마라도는 제주 모슬포와 송악산 선착장에서 주민과 관광객을 실어나르는 배편으로 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배에서 내려 선착장을 벗어난 지 2~3분이면 기대했던 마라도의 자연경관 대신 중국집 골목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골목길을 통과하자 이집저집에서 손짓하는 아낙네들의 호객행위가 이어집니다.
일단 마라도 주변을 둘러보려면 중국집 골목을 통과해야 했고, 여기저기서 짜장면 먹고 가라는 소리에 잠시 머뭇거리던 관광객들은 하나 둘씩 식당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습니다.


저도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짜장면 맛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신문에도, 잡지에도, TV에도, 그리고 인터넷에서도 이 마라도 짜장면의 명성은 대단합니다.
저는 주변의 호객행위에도 꼿꼿하게 이 집을 선택했습니다. 모두가 저마다 '원조'를 외치고 있지만, 이곳이 진짜 원조라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옛날 어떤 CF에서 개그맨이 "짜장면 시키신 분"이라는 광고 카피를 외친 걸 보고 착안했다는 마라도 짜장면.
이후 무한도전 등을 비롯해 각종 예능 프로그램이 마라도를 촬영하러 올 때는 성지순례처럼 들러 맛보았던 곳이기도 합니다.
식당 앞에 다가서자 각종 TV 프로그램에서 방영했다는 걸 자랑스럽게 내 걸고 있습니다.

KBS, MBC, SBS 공영방송이 인정한 원조집.
12개 TV 방송사, 15개 신문사가 공식 인정한 원조집.
무한도전팀(유재석, 정형돈, 노홍철)이 짜장면 맛있게 먹고 '신이시여' 감탄한 곳.
미국 CNN TV 방송에 소개된 세계적인 짜장면.
일본 니혼TV 방송국에서 원조 마라도 짜장면집 OOO 사장 직접 출연
짜장면 요리시범 방송 후 출연료 천만원 받았습니다. 세계 최초 짜장면에 관한 특허 획득!


간판만 봐도 정말 요란한 문구에 현란한 이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곳의 명성은 신문 기사를 통해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톳을 넣어 담백한 짜장면"
"15가지 해산물과 30여 가지의 채소가 들어간 짜장면"
"무한도전 멤버들이 엄지를 치켜세우며 먹었던 짜장면"
"육지에서는 맛볼 수 없는 특허 낸 해물 짜장면"


이쯤 되니 그냥 지나치는 것도 실례입니다. 


맛을 보기 위해 자리에 앉자 주문을 받으러 오는데 메뉴판이 따로 없고 대부분은 짜장과 짬뽕을 시킵니다. 
돈은 선불이며 서빙이 따로 없고 호명하면 손님이 음식을 가지러 가는 셀프 형식입니다. 가격은 짜장면이 육천 원, 짬뽕은 만 원.
그러자 옆 테이블 손님과 주인 아주머니 간의 가벼운 실랑이가 벌어집니다.

"짬뽕은 왜 이리 비싸요?"
"이게 비싼 게 절대 아니에요."
"아니 그래도 만 원씩 한다는 건 좀"
"일단 함 드셔 보세요. 육지에서는 절대 이 맛을 못 봐. 들어가는 재료가 틀리다니깐요. 만 원을 줘도 제대로 된 짬뽕을 드셔야지"


아주머니의 무한한 자신감이 손님의 기를 눌러버립니다. 옆에서 듣던 저 역시 만 원짜리 해물 짬뽕이 궁금해 주문해 버렸습니다.
사실 가격으로만 따지면 생각했던 것보다 비싸거나 우려했던 바가지는 아닙니다. 육지에서도 만 원짜리 해물 짬뽕은 얼마든지 있고요.
육천 원짜리 짜장면이라고 해도 육지에서는 삼선 짜장면값일 겁니다. 더군다나 여기는 무려 특허 낸 마라도 짜장면이 아니겠어요.
무언가 육지 짜장면과는 다른 특별함이 있으리라. 그렇다면 이 가격은 그다지 아깝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1997년에 탄생한 마라도 최초의 짜장면

음식은 주문 후 15분이 지나서야 나왔습니다. 갈길 바쁜 관광객에게는 이것이 불만일 수도 있겠습니다.
마라도 짜장면은 첫인상부터가 육지와 다른 인상을 풍깁니다. 특히 고명으로 올려진 톳과 오징어가 눈에 띄는데요.
매콤하게 무쳐낸 오징어는 짜장과 함께 섞이면서 알싸한 맛이 전해지는 게 흡사 '사천 짜장면' 맛이 나는 것도 같습니다.
어린아이가 먹기에는 제법 맵습니다. 그런데 이 집의 시그니처라 할 수 있는 '톳'은 생각보다 각박한 양이 뿌려집니다.
여기서 톳은 흔하디흔한 해초일 텐데 톳을 아끼는 걸 보니 재료 단가가 비싼가 봅니다.(?)
톳은 제주도 전역에서 볼 수 있지만, 제철이 있습니다. 톳이 안 날 땐 미역 등으로 대체한다고 알려졌습니다.


2004년 한국일보에서는 이 마라도 짜장면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소라 조개 오징어 등 15가지 이상의 해산물과 감자 양파 당근 콩 등 30여 가지의 야채가 들어간다.
장을 만드는 육수는 생선뼈와 해초를 우려서 낸다. 한마디로 구수하다.


최근 이곳을 다녀온 지인은 주인장으로부터 "조미료를 쓰지 않는 짜장면"이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젓가락으로 훌훌 비벼서 맛을 봅니다. 그러나 보도한 대로 육수를 우려서 낸 짜장 맛은 아닙니다. 일반 여느 짜장면과 같은 풍미가 납니다.
한마디로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이런 맛이 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면은 불어 있었고 짜장면은 다소 식어있습니다. 웍에다 갓 볶아 낸 짜장이라 하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어설픕니다.
소스의 점도 또한 상당히 질척한데요. 이는 조리과정에서 전분을 많이 넣었기 때문입니다.
전분으로 떡이 된 짜장면에서 특유의 해물 맛을 기대하기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매콤하게 무친 오징어는 어떨까? 이에 대한 해답은 짬뽕에 있었습니다.


마라도 짬뽕

만 원짜리 마라도 해물 짬뽕입니다. 갖은 해물로 육수를 냈다고는 하지만 제 입에는 시원함이 덜했고 대신 텁텁함이 입안을 감쌉니다.
해물 종류는 어림잡아 3~4가지입니다. 고명으로 올라간 톳이 보일락 말랑 뿌려져 있었고 흔한 국물용 꽃게(살 없는 물게)가 반 토막으로 자리합니다.
대부분의 해물은 작은 알새우, 홍합살, 오징어입니다. 여느 중국집에서 사용하는 해물과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런데 이 오징어가 참으로 묘합니다.


오징어 식감으로 보아 평소 우리가 먹던 그런 오징어가 아닙니다. 쫄깃한 오징어를 기대했다면, 이 오징어를 먹고 고개를 갸우뚱할 것입니다.
오징어 표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끈함 대신 미세한 요철이 있습니다. 씹으면 마치 '스폰지'처럼 무릅니다.
이는 생물 오징어가 가질 수 없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냉동 오징어라는 얘깁니다. 

이 오징어는 우리가 평소에 먹고 있는 짬뽕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다수 중국집에서 사용하는 칠레산 대왕 오징어와 상당 부분 일치합니다. 
살 양이 많은 대신 단가는 저렴하며, 냉동이라 취급하기도 좋으므로 중국집에서 선호합니다..
저는 대왕 오징어와 국내산 살오징어(우리가 평소 시장에서 사 먹는 오징어는 살오징어입니다.)의 특징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오징어가 국내산이
아니란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옆 테이블 손님도 오징어에 일가견이 있는지 절대 국내산이 아니라며 투덜거립니다. 
희한하게도 '오징어 다리'는 짬뽕, 짜장 할 것 없이 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징어 다리만 볼 수 있다면 종을 확실히 알아챌 수 있었을 텐데. 
궁금함에 참다못한 저는 주인아주머니에게 이 오징어의 출처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되돌아오는 답변은

"짬뽕에 들어간 오징어요? 그거 짜장면에 들어간 오징어랑 같은 거에요."

예상 못한 동문서답을 끝으로 아주머니는 주방으로 들어가버립니다.
아니 그걸 누가 모르나? 내 얘기는 오징어 종류에 관한 질문입니다. 종류가 어떻게 되냐고 재차 묻자.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주방장과 시선이 오가며 1초간의 침묵이 흐른 뒤 "국산 오징어"라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이로써 오징어에 대한 의문은 일단락되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찝찌름한 기분이 남은 건 어쩔 수 없군요. 

사실 마라도에서 수입산 오징어를 쓰지 말란 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기대하는 마라도 짬뽕과 짜장면은 당연히 제주에서 난 해산물을 쓰리라 믿고 있기 때문에, 수입산 오징어의 사용은 그야말로 '반전'
일지도 모릅니다. 짜장면의 텁텁함, 국물용 꽃게 반 토막과 오징어, 홍합만으로 국물을 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짬뽕 국물.
정말 마라도 짜장면은 신문에서 보도한 것처럼 조미료를 쓰지 않았을까요?
그에 대한 답변은 가게를 돌아 화장실로 향하면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조미료 봉지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사실 조미료가 빠진 중국집 음식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누구도 중국집 음식이라면 조미료를 쓰는 줄 알고 있으며 이에 대해 용인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조미료가 들어가야 맛이 사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니 짜장면에 조미료가 들어갔네, 안 들어갔네 하는 논란은 불필요합니다.
그러나 언론에서 보도한 "생선뼈와 해초를 우려서 낸다"가 거짓으로 드러난 점은 마라도의 청정한 이미지를 믿고 음식을 기대한 관광객들에게 배신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지금의 논점은 '조미료가 인체에 해로울까?' 라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닌, '진정성 결여'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음식에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주인장의 이야기가 위 사진으로 거짓임이 드러난다면, '국산 오징어를 사용한다'는 말 역시 신뢰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사실 마라도의 많은 업소 중 한 곳만 맛보고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건 어불성설일지도 모릅니다.
설령 그 집이 '마라도에서 최초로 특허 낸 원조 짜장면집' 이라 해도 말이지요.
하지만 이 집을 롤모델로 삼아 우후죽순 생겨난 다른 집들이 상황이 달라 봐야 얼마나 다르겠냐는 생각은 무리일까요.

물론, 맛이란 것은 지극히 주관적입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마라도 짜장면이 맛없을 수도 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맛있는 기억으로 남았을 수도 있습니다.
'맛(Flavor)'이란? 직접 혀를 타고 전해지는 다섯 가지 맛 외에도 감성을 타고 전달되는 여섯 번째 맛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국토 최남단 마라도에 왔다는 상징성에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먹는 짜장면 맛은 행여 기본이 안 된 음식이라도 충분히 커버 가능할 것입니다.
여기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맛의 상승효과를 보기에 충분합니다. 그래서 구태의연한 '맛 지적질'은 무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맛만 있구먼. 짜장면으로 생계를 꾸리는 주민들에게 너무 가혹한 평가 아니냐"

식의 관대한 반응이라면 할 말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우려하는 건 짜장면의 '맛' 보다도 더 심각한 것에 있습니다.



국토 최남단 마라도는 원래 주변 경관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섬이었습니다. 우선 선착장에 내리면 뻥 뚫린 시야부터 좌중을 압도합니다.
그러나 언제인가부터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한 짜장면집은 마라도의 미관을 해치고 마라도의 정체성을 통째로 바꾸어 놨습니다.
이제 마라도 하면 "짜장면"만 생각날 정도로 그 이미지가 굳혀져 가고 있습니다. 배에 내려 들어가 보면 더욱 실감하게 됩니다. 
선착장 입구에서 2~3분 걸어 들어오면 차이나타운을 방불케 하는 짜장면 집들이 즐비한데 여기저기서 "짜장면 한 그릇 먹고 가, 잘해줄게"라며 호객행위
하는 모습은 청정한 마라도 이미지와 너무 이질적입니다. 이러한 호객행위는 노량진 수산시장, 소래포구 등과 하등 다를 게 없죠.



사용 중지 판정을 받고 섬 한쪽에 방치된 골프용 카트

그 2~3분을 편하게 하고자 한때는 골프용 카트를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몇 년 전 만에도 골프용 카트는 섬 주민보다 많은 80대가 마라도를 질주하였죠. 
짜장면집을 운영하는 주민을 포함, 전부 마라도 주민들이 수익성을 위해 도입한 것들입니다.
한 시간이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는 마라도를 카트로 단축시키며 워킹 여행의 묘미를 잃어버리게 했죠.
지금은 카트 운행이 전면 중단되면서 이렇게 흉칙한 모습으로 방치되어 있으며, 이제 마라도는 국토 최남단이라는 상징보다는 그저 짜장면 한 그릇 후딱
해치운 뒤 대충 둘러보고 가는 황막한 섬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국토 최남단 마라도의 아름다움이 언제까지 짜장면의 그늘에 가려져 있어야 할지,
지금의 마라도는 기약 없는 짜장면 사업으로 말 그대로 웃기는 짜장면이 되어버린 현실이 이내 씁쓸함으로 다가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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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입질의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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