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1> 제주 한치 

예부터 제주도는 맛있는 한치가 나기로 유명합니다. 살이 부드럽고 단맛이 좋은 한치는 일반 오징어보다 가격이 비싼 고급 품종처럼 인식됩니다. 여름이 제철이며 자리돔과 함께 물회 재료로도 인기가 높지요. 뼈째 썰기한 자리돔의 까슬까슬한 느낌이 싫다면 부드럽고 쫄깃한 한치 물회가 입에 잘 맞을 것입니다. 

 

이토록 한치는 우리 귀에 익숙한데 모양은 오징어와 별반 다르지 않으니 한치라는 이름에 대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한치'란? 다리가 "한 치밖에 안 된다."라고 해서 불리게 됩니다. 즉, 오징어보다 다리가 짧다는 데서 비롯된 말이며, 생물학적 분류상으로는 '꼴뚜기과'에 속합니다. 그래서 제주 한치의 표준명은 '창꼴뚜기' 혹은 '창오징어'라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먹는 오징어는 표준명 살오징어)

 

 

한치 말리는 풍경, 제주 고산리 

제주도 해안도로를 달리다 보면 한치 말리는 풍경을 자주 봅니다. 한치는 분명 다리가 짧아서 붙은 이름인데 막상 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양쪽의 긴 다리입니다. 분명 수조 속 한치는 저렇게 긴 다리가 없는데 말린 한치는 두 다리가 매우 길게 나와 있습니다. 어찌 된 걸까요? 이 녀석은 한치가 아니란 말인가요?

 

 

#. 죽으면 촉수만 축 늘어져

결론부터 말하자면, 위 사진은 분명 한치(표준명 창꼴뚜기)가 맞습니다. 사실 우리가 주로 사 먹는 오징어(연체동물), 문어, 낙지 등등을 통틀어 '두족류'라고 부릅니다. 두족류는 크게 십완목과 팔완목으로 구분합니다. 십완목(十腕目)은 다리가 10개 달린 생물로 오징어, 한치가 여기에 속합니다.

 

팔완목(八腕目)은 다리가 8개 달린 것으로 문어, 낙지, 주꾸미가 해당됩니다. 한치 다리는 총 10개인데 엄밀히 말해 양쪽에 긴 다리는 다리라기보다는 '촉수'에 가깝습니다. 평소에는 이 촉수를 숨기고 있다가 먹잇감이 나타날 때만 쭉 뻗어 잡아채며, 짝짓기 시즌에는 암컷을 부둥켜 안기 위해 쓰기도 합니다.

 

이 촉수를 전문용어로 '촉완'이라고 부릅니다. 촉완은 살아있는 한치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죽으면 힘없이 축 늘어지며 위 사진처럼 매달면 중력에 의해 그 길이가 좀 더 늘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한치를 말리면 살아있을 때 잘 보이지 않았던 촉수 다리가 아주 잘 보이는 것입니다. 

 

 

준치 오징어 말리는 풍경, 제주 월정리 

#. 제주도엔 한치만 말리는 건 아니다? 
그런데 제주도를 여행하다 보면 한치와는 다르게 생긴 오징어를 말리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합니다. 제주도에서는 이 오징어를 '준치'라고 부릅니다. "썩어도 준치"는 청어과의 '준치'라는 물고기를 말하지만, 제주도는 이 오징어가 맛과 모양새에서 한치와 오징어의 중간쯤이라 하여 '중치'라 불렀고, 현재는 '준치'라는 이름으로 굳혀졌습니다.

 

실제로 준치 오징어는 오징어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식감은 한치와 비슷할 정도록 부드럽습니다. 맛은 개인적으로 한치가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한치는 갓 잡은 생물을 말려 한 없이 부드럽고 감칠맛이 나며, 준치는 좀 더 씹는 식감을 선사합니다. 이 외에도 한치와 준치 오징어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사진 2> 한치

우선 생김새부터 살피자면, 몸통 모양이 다릅니다. 위 사진은 제주도 근해에서 잡힌 한치(표준명 창꼴뚜기)의 모습입니다.

 

 

 

<사진 3> 준치 오징어 

그리고 이것은 준치 오징어의 모습니다. 빛깔도 빛깔이지만 몸통의 차이가 보이시나요? 아래 상세한 비교로 알아봅니다.

 

 

한치(왼쪽)와 준치(오른쪽) 

한치는 물결 지듯 유선형의 매끄러운 몸통을 가졌지만, 준치는 직선에 가까운 형태입니다. 색도 차이가 납니다. 한치는 우윳빛의 뽀얀 색이 나고, 준치는 일반 오징어처럼 노르스름합니다. 양쪽으로 뻗은 촉완(촉수 다리)의 길이는 한치가 오히려 길고, 준치는 짧습니다. 


한치 말리는 풍경은 차귀도가 내려다보이는 제주 고산리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즉, 제주도의 서쪽 해안에서 주로 말려지고 있습니다. 반대로 준치 오징어는 제주도의 북동쪽 해안 즉, 동북 해안도로에서 말려진다는 점도 차이입니다.   

 

그런데 한치와 준치의 차이는 이게 다가 아닙니다. 생물학적 분류로 보면 한치와 준치는 모두 오징어의 한 종류입니다. 제주도 한치의 정식명칭은 '창꼴뚜기(혹은 창오징어), 그런데  준치 오징어의 정식 명칭이 심상치 않습니다. 

 

준치 오징어의 표준명은 '아르헨티나짧은지느러미오징어(학명 : Illex argentinus). 흔히 '일렉스 오징어'로 통하는 남서대서양이 주 서식처인 오징어입니다. 다시 말해, 준치 오징어는 우리 바다에는 서식하지 않은 외래종이자 원양산이었던 것이지요. 그럼에도 이 준치 오징어가 어느 뉴스에서는 이렇게 표현되고 있었습니다. 

"15일 제주지방이 화창한 봄 날씨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남제주군 성산읍 시흥리 해안에서 주민들이 갓 잡아 올린 준치오징어를 따스한 햇살에 말리고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갓 잡아올린"이란 표현입니다. 준치 오징어는 원양산(또는 수입산)으로 들여와 제주도에서 건조됩니다. 우리나라는 1985년부터 원양산 오징어 조업에 착수, 지금은 과거 포클랜드 전쟁이 있었던 남서 대서양에서 잡아 원물을 선동(배에서 급랭)한 것을 제주도에서 말립니다.

 

포클랜드는 남아메리카의 최남단 즉, 아르헨티나에서 동쪽으로 수백 해리 정도 떨어진 규모가 제법 큰 군도입니다. 이 해역은 남극해에서 밀려 올라오는 냉수성 해류와 북쪽에서 내려오는 따듯한 해류가 만나 풍성한 어장을 형성합니다. 오징어는 기본적으로 따듯한 수온을 좋아하기 때문에 남극해에서 올라오는 찬 해류가 강해지면 조업량이 떨어지고, 멕시코에서 내려오는 난류가 강해지면 조업량이 오르는 특성을 보입니다.

 

우리나라는 중국, 대만과 함께 수십, 수백 척의 대형 선단을 이곳으로 파견해 오징어 조업 중이며 여기서 어획한 오징어는 전국의 각 재래시장으로 유통되고, 일부는 제주도에서 반 건조돼 '준치 오징어'란 이름으로 팔리고 있습니다. 준치 오징어가 한치보다 가격이 저렴한 것도 원양산이고 물량이 많아서겠죠. 


지구 반대편에서 온 손님이니 신선도가 걱정되지만, 실제로는 급랭으로 잘 유지된 오징어를 해동해서 말리므로 문제없습니다.반건조라 보통의 마른오징어보단 통통하고 식감이 부드러운 것도 특징입니다. 이와 비슷한 것을 꼽으라면 국산 살오징어로 말린 포항 피데기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러한 정보를 일일이 알고 먹지 않습니다. 먹는데에도 딱히 지장을 주지 않으며, 특별히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전파력 있는 뉴스나 매거진으로 기사가 나갈 때는 이러한 사실이 제대로 전달돼야 할 것입니다. 이를 모르고 쓰게 되면 앞서 뉴스 기사에서 보았듯, "갓 잡아올린 준치오징어"란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식'이 화두가 된 요즘, 소비자들도 식재료에 대해 알고 먹을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 가족, 내 아이가 먹는 수산물은 원산지와 어종(종류)에 따라 구매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정보를 가린 채 은근슬쩍 제주 특산물이라고 끼워서 판다면 결국에는 해당 식재료의 투명성을 잃고, 정보는 왜곡됩니다. 그 결과가 준치 오징어를 으레 제주산으로 알고 먹게 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베트남산 한치 

한치가 잘 잡히지 않는 겨울~봄 사이 물회로 사용되는 '냉동 한치'도 원산지 표기를 강화해야 합니다. 현행법상 냉동 수산물에 대해서는 원산지 표기 의무가 없기 때문에 베트남산 한치나 원양산 선동 한치를 사용해도 원산지를 표기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아무런 법적 제재가 없습니다.

 

그 사이 우리는 한치를 '제주산 한치'로 알고 먹게 됩니다. 어쩌면 준치라는 오징어가 있었는지 조차도 모를 대다수 소비자, 혹은 준치 오징어를 제주산으로 알고 사 먹었던 이들이 태반일지도 모릅니다.  

 

※ 글 : 김지민 어류 칼럼니스트                    
유튜브에서 ‘입질의추억tv’ 채널을 운영 중이다. 티스토리 및 네이버에서 블로그 ‘입질의 추억’을 운영하고 있으며, EBS1 <성난 물고기>, MBC <어영차바다야>를 비롯해 다수 방송에 출연했다. 2018년에는 한국 민속박물관이 주관한 한국의식주 생활사전을 집필했고 그의 단독 저서로는 <짜릿한 손맛, 낚시를 시작하다>, <우리 식탁 위의 수산물, 안전합니까?>, <꾼의 황금 레시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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