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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탕과 밥상의 정석, 사직동 수대구탕
십수 년 전만 해도 '맛집'이란 단어는 꽤 생경했습니다. 지금은 맛집으로 도배된 세상이 되었죠. 여기도 맛집, 저기도 맛집. 사람들은 온, 오프라인에서 맛집만 찾아다녔고 그래서 지금은 맛집의 홍수 속에 살게 되었지만, 정작 맛집이라 할 만한 식당을 찾아내기란 매우 어려워졌습니다. 너도나도 맛집을 찾고 있고, 식당은 서로가 맛집이라 자처하면서 맛집이 가지는 인식의 가치와 신뢰도는 점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인제 사람들은 맛집의 과용에 피로감을 느끼게 된 것이지요. 보석은 그 자체로 가치가 빛나는 존재지만, 보석으로 위장한 유사품이 쏟아져나오면 소비자의 분별력을 흐리게 하고 결국, 진품을 구별하는 감별사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어떤 분야나 현상을 선도하는 유행이 지나치게 과용되다 보니 정작 가치를 인정받아야 할 것은 그에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쏟아지는 가짜들에 묻히게 되는, 이 건강하지 못한 현상이 지속된다면, 언젠가는 반복되는 학습과 내성으로 똑똑해진 소비자들이 외면하게 될 것입니다.
맛집이란 단어가 생기기 이전에는 그냥 '식당 탐방기' 정도였습니다. 개성 있는 메뉴는 언제나 소비자로부터 환영받지만, 그것이 정체되면 한때의 유행으로 끝나버려 업종 전환을 고민해야 하는 OO불닭이나 OO찜닭 같은 상황에 처할 수도 있겠죠. 맛집이라 말하기 전에 '밥집'입니다. 밥집은 밥맛이 좋아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의 식당에서 밥맛이 좋은 식당을 찾아내기란 하늘의 별 따기 같습니다. 제아무리 유명한 맛집도 주메뉴에만 신경 쓸 뿐, 밥에는 아무런 개성도, 맛도 찾을 수 없게 되었죠. 그런데 오늘 소개하는 집은 메뉴 구성이나 상차림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밥상의 기본'에 대해서는 한 번쯤 생각하게 한 곳이었습니다.
사직동 수대구탕
들어가면서 주방이 보이길래 잠시 눈길을 멈춥니다. 그 짧은 찰나의 순간에 보았던 것은 식기도 뭐도 아닌 타일입니다.
특히, 가스렌지 주변에는 늘 찌든 때가 끼기 마련이죠. (우리도 매번 청소하지 않으면 그렇겠죠.)
보시다시피 깨끗한데 이것 하나만으로도 주방의 청결도를 가늠하기에는 충분할 것입니다.
주메뉴는 대구탕. 그 외 보쌈과 오리를 취급하는 정도이니 메뉴 자체만으로는 그리 화려하지도 특별한 것도 없습니다.
원산지는 참고하시고요. 원산지가 잘 보이도록 조금 크게 붙여놓았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코다리 조림
코다리는 반건조한 명태를 말하지요.
잡채
가지찜
사진을 일일이 찍지는 않았지만, 이 외에 전어 젓갈을 비롯해 몇 가지 밑반찬이 깔리는데 가짓수가 많지는 않지만, 집에서 만든 것처럼 깔끔하고 정갈합니다. 특히, 양념장을 올린 가지찜(볶은 것일 수도 있음)은 방법이 궁금하더군요.
한방보쌈(大)
보쌈의 담음새만으로도 주인의 성격이 보여집니다. 어떤 곳은 투박하게 썰어 접시에 뭉텅이로 올리는가 하면, 또 어떤 곳은 이렇게 정리정돈이 잘 되는 꼼꼼함을 보이기도 하지요. 주재료인 돼지고기를 제외한 곁들임 음식은 모두 국내산이고 그날 팔아야 할 분량을 손수 만든다고 합니다. 한방보쌈이란 이름처럼 8~10가지의 한약재를 넣어 푹 삶았다는데 여기서 제가 우려했던 한약재 냄새는 거의 나지 않았다는 점. 처음에 보쌈을 맛보고 원산지 표기를 보지 못했다면, 국내산 돼지고기로 알 뻔했습니다. 수입산 냉동으로 삶으면 저런 윤기가 나지도 않을뿐더러, 퍽퍽해짐을 피하기가 어려운데 이 집 보쌈은 그냥 국내산 돼지고기를 삶아 먹는 맛과 같아 칠레산 냉장육에 대해 다시 한 번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먹는 동안에는 이렇게 화로에 올려 온기를 유지하게 했고
부위는 삼겹살를 비롯해 처음에는 이 부위가 항정살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가브리살로 보입니다. 가브리살은 항정살과 함께 돼지고기의 고급 부위 중 하나지만, 돼지고기의 질(지방 분포도)과 유통 상태에 따라 맛은 천차만별입니다.
이 이야기를 쓰고 나니 어제 삼천포로 낚시하러 갔다가 근처에서 맛 본 돼지고기가 생각났습니다. 모둠을 주문했는데 항정살과 가브리살이 나왔고 국내산 냉장육임에도 맛이 너무 없어 먹다가 남겨버렸지요. (제가 고기는 어지간해서 남기지 않는데) 구이용으로 숫돼지를 쓰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면서도 퍽퍽함은 물론, 스멀스멀 올라오는 잡내 때문에 도무지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살과 지방의 비율도 좋지 못했고, 더욱이 이때는 돼지고기 구이집을 오랫동안 운영한 전문가와 함께 먹으면서 제가 정확히 짚어내지 못했던 부분을 알게 되었는데 여기서 든 생각은 수입 육은 무조건 질이 떨어질 것이라는 편견을 버리자는 것입니다.
국내산 돼지도 등급과 품질에 따라 맛 차이가 크게 나듯이, 수입육도 수입육 나름임이 새삼 느껴집니다.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칠레산 냉장육은 고깃집을 운영하거나 유통하는 업자들 사이에서 "국내산 돼지고기의 맛과 가장 흡사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더군요. 아마도 그것은 사육 방식과 사료와 밀접한 연관이 있겠지만, 칠레산이 여러모로 국산 돼지고기와 유사하다 보니 국내산 돼지고기로 둔갑하여 팔리기도 했답니다.
보쌈김치는 당일에 팔 분량을 미리 만들어 놓지 않고, 보쌈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곧바로 무쳐낸다고 합니다.
배추는 물론, 고춧가루도 국내산을 쓰면서도 식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저희 업소는 국내산만 사용합니다."라는 푯말조차 없다니요. 이에 대해 이 집은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는 표정입니다.
상차림의 모습은 이러합니다.
처음에는 가브리살을 김치에 말아서 맛보고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오겹살은 묵은지나 전어 젓갈을 곁들어 먹어보는데 이게 도무지 수입산이라는 생각이 안 들 정도로 맛이 담백합니다. 단골 정육점에서 좋은 돼지고기 사다가 집에서 푹 끓여도 미약하게나마 잡내가 나기 마련인데, 아무래도 여기에 들어가는 몇 종류의 한약재가 잡내를 완벽하게 통제했다고 봐야겠지요. 집에서 삶을 때는 기껏 해봐야 커피나 된장 조금, 마늘, 대파, 생강, 소주 정도 일 테니.
하지만 이 집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뜻밖에도 밥이었습니다. 보통의 식당에서 밥이란 단가를 아끼기 위한 수단 정도로 쌀을 대량으로 구매해 놓고 쌀의 품질 자체도 신경 쓰지 않은 것이 일반적입니다. 사실 밥 이야기를 하자면, 쌀의 품종, 생산지, 탈곡 시기를 빼놓을 수 없지만,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식당을 찾아보기란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게다가 그 밥을 담아내는 식기마저도 천편일률적으로 스테인레스 용기에 꾹꾹 담아 뚜껑을 덮어 놓고선 보관해 두지 않습니까? 그러한 보관법으로 인해 밥의 열기는 뚜껑에 맺혀 습기를 만들게 되고, 그 결과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눅눅한 공깃밥을 먹게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식당의 고질적인 문제여서 기대하지도 않지만, 그나마 이 집은 밥을 지을 때 가정에서처럼 20kg 단위로만 구입한 햅쌀에 찹쌀을 섞어서 지으니 밥이 덜 눅눅하고 찰기가 난다는 점이 기억에 남는군요. 만약, 밥을 미리 담아 놓지만 않는다면, 그래서 주문 들어올 때마다 곧바로 공깃밥을 퍼서 낸다면, 밥맛은 200% 향상될 텐데 식당의 편리로 인해 대부분 그리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좀 안타깝습니다. 식당 밥맛이 다 똑같은 이유도 여기에 있겠지요. 그런 부분에서 이 집은 밥맛에 개성을 살린 것이라 봅니다.
식당에서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밥맛을 접한 적이 과연 얼마나 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건 몰라도 전어 젓갈 한점 올려 먹었을 때의 밥맛이 아직도 생각나는군요.
생대구탕
가덕도산 생대구탕
생대구탕의 가격은 그날 시세에 따라 다르므로 '싯가'라 표기되어 있지만, 가격은 대체로 15,000원 선입니다. 거제도에서 맛볼 수 있는 가덕도산 생대구탕도 마찬가지고요. 아는 이들은 아시겠지만, 생대구탕 재료 중 최고는 가덕도산 대구입니다. 하지만 10월 말인 이때는 가덕도산 대구가 나오기에 조금 이른 시기여서 처음에는 가덕도산이 아닌 줄 알고 있었다가 제 차 확인해 보니 가덕도산 대구였습니다. 가덕도는 부산과 거제도 사이에 있는 섬으로 진해만이라는 황금어장을 끼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잡히는 대구는 개체 수 보존과 어민의 소득 증대를 위해 대부분 치어를 방류한 것입니다. 이렇게 방류한 대구는 주로 베링해를 횡단하면서 북극해에서 내려오는 한류를 맞고 살을 찌우다 늦가을이면 회귀본능에 따라 어김없이 진해만을 찾아옵니다. 이때 어획되는 시기는 추석이 지나면서지만, 본격적인 시즌은 11월 말부터 시작해 이듬해 2월까지 이어집니다. 이때의 대구가 가장 맛이 좋은 이유도 겨울을 나기 위해 살과 지방을 찌우는 데 있지만, 대구는 무엇보다도 알과 곤이(정확한 명칭은 이리)가 가득 찰 시기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대구탕에 들어가는 저 꼬불꼬불한 것을 '곤이'라 부르지만, 정확한 명칭은 '이리'입니다. 곤이란 말은 자손의 번식을 뜻하기 때문에 명란젓의 주재료인 알집(난소)에 해당하며, 이리는 꼬불꼬불한 수컷의 정자 주머니를 뜻하지만, 이게 어쩌다 뒤바뀌다 보니 대부분 식당에서는 수컷의 정자 주머니(정소)를 곤이로 부르게 되어 오늘날에는 아예 곤이란 말로 잘못 정착되었죠. 어쨌든 이리는 대구탕에서는 빠질 수 없는 별미라 시세에서도 암컷보다는 수컷이 조금 더 값이 나갑니다. 서울과 수도권에서 대구탕이라 하면, 고춧가루를 푼 매운탕을 떠올리지만, 이쪽 가덕도와 부산 일대에서는 말간히 끓인 맑은탕(지리) 스타일이 예부터 유명했습니다. 그러니 양념장 비법이랄 것도 없으며 주재료인 대구가 질이 좋아야 함에는 두말하면 잔소리겠지요.
생대구의 목살만 사용한다.
한 가지 인상 깊었던 것은 생선 부위 중 가장 식감이 쫄깃하고 고소한 목살만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처음에는 뽑기 운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이집은 냉동이든 생물이든 목살 외 몸통은 아예 사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수십 년간 대구탕을 끓인 수대구탕(예전 낙원쌈밥) 사장님은 그 이유를 식감과 맛에 있다며, 자신의 오랜 대구탕 철학을 늘어놓습니다. 사실 이 집 대구탕의 역사는 참으로 유구합니다. 수대구탕은 개업한지 올해로 1년째를 맞지만, 그 전신은 사직동에서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노포로 지켜온 '낙원쌈밥'이었습니다. 주인도 주방일을 하는 분도 그대로죠. 당시 제가 중학생이었을 때 아버지 따라 이 집 대구탕을 맛보았고, 이후 부산에 내려갈 때마다 틈틈이 맛보았으니 그 세월도 30년이 다 돼 가네요. 지금은 세월 속에 잊힌 낙원쌈밥 대신 새로운 상호로 개업했지만, 그때의 노하우가 어디 가겠습니까.
생대구 목살의 두께 감은 대략 이러합니다. 참고로 목살이라는 부위는 조금 생소할지도 모르지만, 알고 보면 모든 생선에 다 있습니다. 생선이 물속에서 방향타 역할을 하는 가슴지느러미(옆 지느러미)가 붙은 삼각형 모양의 살로, 참치 업계에서는 이 부위를 '가마도로' 혹은 '가마살'이라 부릅니다. 생선이 알에서 태어나 죽을 때까지 수없이 움직여 온 가슴지느러미이기에 거기에 붙은 살은 오죽 쫀득할까요. 그래서 이 목살의 쫀득함은 생물이라 해도 팔팔 끓였을 때 쉬 풀어지지 않아 쫄깃한 식감과 고소함을 그대로 갖는 부위입니다.
대구탕에 대구 몸통은 맛이 없어 목살만 사용하게 된 것이라는 게 사장님의 설명인데 냉동 또한, 수입산 대구 목살만 추려낸 벌크가 많이 유통되기 때문에 요즘 대구탕 하는 집들이 즐겨 사용하지만, 그 와중에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몸통을 포기할 수 없어 섞어 쓰는 집들도 허다하죠. 그런 현실에서 생대구의 목살만을 가져와 쓴다는 건, 맛의 고집이 없으면 실현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이 목살은 이 집에서 만든 특제 소스에 찍어 먹도록 되어 있습니다.
살이 단단하고 양도 많으니 이렇게 소스에 찍어 먹는 대구탕 맛이 더욱 각별히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사직동 수대구탕 : 본문 아래 지도 참조
영업시간 : 10:00~22:00(일요일 휴무)
내비주소 : 부산시 동래구 사직2동 78-20
주차시설 : 근처 사직 주차장
어떤 식당에 갔을 때 밑반찬이 정갈하고 밥과 김치 맛이 좋으면 그 집이 아무리 평범한 메뉴를 다루어도 저는 기대하게 됩니다. 유행을 좇다 2~3년 만에 문 닫는 식당보다는 이렇게 기본에 충실한 식당이 더 많이 생겨나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비록, 상호 명은 낙원쌈밥에서 수대구탕으로 바뀌었기에 오랜 세월 간 이어진 노포의 맥은 끊겼지만, 그 맛은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으니 그때의 맛을 꾸준히 이어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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