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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일이다. 여느 때처럼 잠에서 깼는데 꿈을 꾸는 것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간다. 잠시 뒤척이면서 머릿속 혼란을 떨쳐내 보려 해도 뒤숭숭한 기분은 좀처럼 떠나질 않는다. 30년 후 딸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옆에는 갓난아기도 있었던 듯하다. 딸의 앳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냥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 평범한 가정을 꾸리는 새댁이 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70이 넘은 나는 별안간 할아버지가 되어 있었던 것 같고. 중간 과정은 생략된 채 요상한 상황에 내동댕이쳐진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했다.
꿈인 걸 알아챘고 일어나서 물 한 컵도 마셨지만, 떨떠름한 기분은 좀처럼 나아지질 않는다. 30년이 지난 그때에도 우리가 행복할 자신이 있다면 그 또한 좋은 삶이겠지만, 이래나 저래나 지금이 행복한 시절이었음을 부인할 순 없을 것 같다. 그걸 좀 일찍 깨닫고 감사하면서 살아야 할 텐데, 작은 행복이 먼 미래에 돌이켜보면 커다란 행복이었음을 알지 못하다가 꼭 후회한다. 그때 더 잘할 것을.
이제 27개월인 딸은 다른 아이와 마찬가지로 조금씩 세상 사는 법을 배우는 듯하다. 누군가가 말하길 애교는 살기 위한 본능이라던데 요즘 애교가 철철 넘치는 딸이 그 정도로 살기 위한 몸부림을 쳤어야 할 상황인지는 잘 모르겠다. ^^; 처음에는 또래 아이들이 대부분 가진 그런 애교인 줄 알았는데 어린이집 선생님 의견도 그렇고, 평소 말투나 표정에서 유난히 애교가 많이 배어 있는 듯하다. 붙임성이 좋아 선생님들 사랑을 많이 받다 보니 다른 아이들의 질투심도 종종 유발한다고 한다.
또래보다 말이 빨라 이제는 참견도 한단다. 밥 먹을 때면 친구들에게 "골고루 먹어, 그래야 키가 쑥쑥 큰다.(이건 내가 딸에게 하는 말인데)"라고 말하면서 정작 자기는 반찬을 남기기도 하고, 놀 때는 주도적이면서도 친구들에게는 장난감을 곧잘 양보하는 편이라고 한다. 최근에는 A형 독감에 걸려 고생 좀 했다. 어린이집 출석을 전면 통제하고 집에만 두었더니 투정도 부쩍 늘었다.
책상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는데 막 잠에서 깬 딸이 문을 열고 쪼르르 나온다. 딸을 보니 좀 전에 혼란스러웠던 기분이 말끔히 없어졌다. "아뽜 안아죠" 하고 달려와서 안기고는 오늘도 어김없이 "우주 보여주세요."라고 한다.
딸이 말하는 우주는 걸그룹 우주소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트와이스가 대세였는데 지금은 우주소녀를 더 좋아하게 됐고, 그 덕에 나도 멤버들 얼굴을 다 안다. ^^; 노랠 틀어주면 박자에 맞춰 몸을 들썩인다. 이 녀석 몸으로 그루브를 타네? 그리곤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따라부르려고 애쓴다. 이제 27개월인데 벌써 걸그룹 노래에 흥얼거릴 줄이야.
요거트를 먹고선 흰 수염이 났다고 좋아하는 녀석. 먼 훗날엔 지금 딸의 모습이 사무치게 그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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