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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하고 정갈한 추어탕 한끼(성남시 남추어탕)
특별히 가리는 음식을 가리지 않는 저도 추어탕만큼은 굳이 챙겨 먹는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어렸을 때 먹었던 추어탕이 비렸지만, 어른들의 권유로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했던 그일 이후로는 작은 트라우마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추어탕은 보양식이 아닌, 비리고 흙내가 나는 음식으로 기억되었죠. 그러다가 얼마 전, 지인의 추천으로 우연히 추어탕을 접하고선 어렸을 때 느꼈던 기억의 아픔을 떨쳐버릴 수 있었습니다. 기존에 알던 추어탕 특유의 비린내와 흙내를 느낄 수 없었던 것. 그 정도로 깔끔하고 정갈해 찬바람이 불 때면 가끔 생각나곤 합니다. 이 집은 성남에서 상당히 오래된 추어탕 집입니다. 십년지기 단골도 허다하지요. 남들 중국산 미꾸라지를 쓸 때 국산 미꾸라지만 고집하며 외길을 걸어온 식당의 발자취를 느껴 봅니다.
南추어탕, 경기도 성남
추어탕은 간 것과 통으로 낸 것이 있습니다. 메뉴판은 외길을 걸어온 흔적이 그대로 묻어나 있군요. 미꾸라지를 갈아서 속을 채운 추어만두와 통째로 튀긴 추어튀김이 눈에 띄며, 여기에 사용된 미꾸라지와 고춧가루는 국내산이라는 점에서 신토불이로 꾸린 한 끼 식사가 기대됩니다.
추어탕에선 빠지지 않은 초피(제피)가루입니다. 초피는 미꾸라지 특유의 비린 맛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지만, 이 집 추어탕은 워낙에 맛이 깔끔해 굳이 넣어서 먹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추어탕에는 역시 '산초가루'를 넣어야지. 라고 생각하는 손님이 많아서 습관적으로 넣는 이들을 볼 수 있었는데 여기서는 잡내를 가릴 만한 요소가 적어서 초피 특유의 향을 느끼고자 하는 취향 정도가 맞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잡내를 가리기 위해 그 무엇을 첨가해야 하는 음식이라면, 굳이 왜 먹어야 하나? 의문을 가집니다.)
※ 참고로 초피(제피)와 산초는 완전히 다른 나무이자 열매입니다. 부연 설명은 아래 댓글 주신 분이 잘 설명했네요.
추어탕에 넣어 먹는 간 마늘과 다진 고추(땡초)입니다.
깍두기와 열무김치는 덜어서 먹도록 나오는데 둘 다 맛이 깔끔하고 정갈한 편입니다.
언뜻 보아선 고춧가루가 많이 들어가지 않아 간이 심심할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먹어보면 그 안에 들어야 할 맛은 다 들었습니다. 직접 담가서 익힌 정도도 알맞고, 너무 자극적이지 않은 양념이면서도 적당히 발효된 맛이 난다는 점으로 미루어보면 기본 찬에 대한 우직한 내공이 엿보이는 대목이죠.
열무김치는 삼삼한 맛이지만, 그렇다고 간이 싱겁지는 않습니다. 씹으면 아삭함이 살아있고 발효에 의한 청량한 맛도 느껴집니다. 얼마 전에 쓴 수대구탕에서도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밥과 김치 등 가장 기본적인 찬에서 맛이 좋으면 저는 그 집이 다루는 음식에 대해 신뢰하며 믿고 먹습니다. 사실 밑반찬은 당장에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은 '조용한 내공'이지만, 결국에는 음식의 기본을 말해주는 것이므로 저는 '좋은 식당이 갖춰야 할 덕목'으로 생각합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잣대일 수도 있지만, 저는 김치를 포함해 기본적인 밑반찬에서 음식에 대한 신념을 살핍니다. 이런 집은 유행을 타지 않으며 대체로 오래가지요. 평소 자극적이거나 인스턴트 음식에 질린 사람들이라면, 가끔 생각나는 음식 휴양지이기도 합니다. 자주 찾지는 못해도 우리 주변에 하나쯤은 있었으면 하는 것이지요.
오랜만에 맛 보는 번데기는 테이크 아웃의 원조 음식이죠. 길거리에서는 주로 고둥과 함께 팔았는데 깔때기 같은 종이에 담아주면 이쑤시개로 먹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번데기는 동네 호프집에서 매콤하게 볶아낸 것을 좋아했지요. ^^
좀 전에 '조용한 내공'이란 표현을 쓴 것에는 이 집의 바지락 젓도 한몫했습니다. 밥상에 젓갈이 올려지면, 좋아하는 사람만 몇 점 집어 먹을 뿐이지만, 여기서는 그런 호불호를 잠재울 만큼 강한 중독성을 품고 있습니다. 정갈하고 깔끔한 맛을 바탕으로 있어야 할 맛은 다 품고 있는 것. 여기에는 '간의 세기'가 크게 작용합니다. 이 집 반찬의 전반적인 특징이기도 한데 들쭉날쭉하지 않은 간의 균형이 절묘해 계속해서 젓가락이 가게 합니다. 소금에 오래 절이면 짜기도 짜지만, 살의 탄력이 삭아서 무르기 마련인데, 이 집의 바지락 젓은 향이 좋은 기름으로 즉석에서 무쳐낸 맛입니다. 그래서 바지락 젓은 이 집을 찾는 손님들이라면 한 번쯤 리필해서 먹을 정도로 상징이 되었죠.
보잘것 없는 조개젓 한 점이 밥맛을 크게 상승시킨다
추어튀김
입가심으로 주문한 추어튀김은 갓 튀겨져 나왔기에 적당히 높은 온도를 갖고 있습니다.
튀김 옷도 그런대로 바삭한 편이고, 통으로 들어간 추어가 비리지 않고 담백하니 식전에 세 명이 한 접시 시켜먹기 적당합니다.
추어탕이 나오고
국산 미꾸라지를 갈아 넣은 추어탕
먼저 국물 맛을 보고 간 마늘과 고추, 부추를 곁들인 다음 휘휘 저어 먹습니다.
우거지가 푸짐히 들어갔다
남추어탕 위치 : 아래 지도 참조
내비주소 :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심곡동 252-6
주차시설 : 완비
처음에는 밥과 따로 먹다가 1/3 정도 먹고 나서는 말아봅니다. 예전의 추어탕에서 느꼈던 흙내와 잡내는 눈을 감고 집중해서 느껴보려고 해도 느낄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차단했습니다. 여기서 문제라면 미꾸라지 특유의 잡내가 아예 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추어탕을 즐겨 먹는 이들에게는 지나치게 깔끔한 맛이 되려 단점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정도의 깔끔한 맛은 대중의 호불호를 줄이고 추어탕에 인색했던 이들을 불러모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사실 추어탕에서 가장 우려한 것은 비린내도 흙내도 아닌 텁텁함입니다. 완벽하게 갈린 추어는 그 분말의 입자가 국물의 텁텁함을 가중시키는데 이 집 추어탕은 국물이 텁텁하지 않다는 점이 최대 강점으로 꼽힙니다. 이는 추어를 가는 방식에 있는데 보통은 기계로 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집은 소쿠리를 이용해 일일이 수작업으로 가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한 방식이 추어의 입자를 살려 텁텁함을 줄인 것이고, 이 때문에 가끔 가시가 씹히기도 합니다.
물론, 추어탕에서 가시가 씹히는 것을 불쾌히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그 가시의 크기가 목에 걸릴 정도가 아니어서 먹는 데는 크게 지장이 없습니다. 추어탕의 입자가 거친 것은 국물의 텁텁함을 줄이면서 전통방식에 근접한 것이기 때문에 지금 시대에서는 오히려 환영할 만한 요소겠지요. 이러한 추어탕은 추어의 담백함과 우거지의 씹힘이 좋아 찬바람이 불 때면 종종 생각나게 합니다.
이 집의 한 가지 흠이라면, 줄을 서야 한다는 점입니다. 당일은 물론, 점심때마다 이곳을 몇 번 지나친 적이 있었는데 한창때는 줄을 서야 하며 대기 시간은 10~15분 내외라는 점 참고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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