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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코노스 올드포트
아침부터 내린 소나기와 먹구름에 세상은 모노크롬이 됩니다. 아예 흑백으로 처리하자 50~60년대 항구 풍경처럼 보이는 미코노스의 올드포트.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피신해야 했고, 그렇게 하늘 눈치를 보며 다니다가 오후에는 물에 잠긴 리틀 베니스에서 그림 같은 석양을 보며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도 모를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식사를 가졌던 하루.
그렇게 하루를 꿈처럼 보내자 다음날은 완전히 뒤바뀐 표정으로 우릴 맞아줍니다. 그래 미코노스는 파란 하늘에 흰색 페인트칠을 한 집들이라야 미코노스답지. 가족들이 숙소 앞 해변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이, 저는 카메라를 둘러메고 골목 구석구석을 누비면서 나만의 방식으로 힐링 놀이에 빠져봅니다.
그곳은 한 음료 광고에서 손예진 씨가 '라라라 라라라라~' 하는 노래와 함께 순백의 상의와 파란 치마를 입고 뛰어다녔던 호라 마을(Chora). 지금은 이 미로 같은 골목길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명소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수십 년 전만 해도 흰색 페인트를 칠해야 하는 것이 의무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자율에 맡기는데요. 매년 봄이면 섬 주민들이 합심해 페인트를 칠하며 관광객을 맞이합니다. 때문에 일 년 내내 거센 바람이 끊이질 않아도 미코노스는 늘 새 집 처럼 하얀 집이 유지되는 이유겠지요.
걸으면 걸을수록 방향감각을 잃고 헤매기 일쑤지만, 마냥 예뻐서 더욱 헤매고 싶어지는 곳. 헤매면 헤맬수록 힐링이 되는 독특한 곳입니다. 저도 지금부터는 특정한 목적지를 두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걸어볼까 합니다.
오전부터 나른한지 연신 하품만 하는 냥이
몸을 다쳐 골목길 구석에서 방황하는 비둘기
상점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하는 멋스러움이 있는 골목
이곳에서는 보기 드문 동양인(어쩌면 한국인인지도)
즉석에서 프린트해주는 티셔츠 가게
전날 우리 가족이 여기서 티셔츠를 몇 장 샀는데요. 인기가 많은 가게인지 손님이 끊이질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프린트가 정말 예뻤던 티셔츠였죠.
명품 샵이 들어설 때도 미코노스의 고유한 분위기를 헤치지 않으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사실 호라 마을 자체는 그리 크지 않지만, 미로처럼 얽힌 골목길에는 상점과 레스토랑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특정한 장소나 원하는 매장을 찾고자 한다면, 사전에 발품을 팔아가며 지리를 익히거나 혹은 구글 지도를 보며 찾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몇 차례 헤매야 찾아갈 수 있는 이 좁은 골목길에는 각종 액세서리와 기념품 샵 특히, 옷가게와 명품샵이 즐비합니다. 여성 분들에게는 또 하나의 쇼핑 천국이죠.
이곳이 특별히 인상 깊었던 것은 단지 흰색 페인트칠을 한 아기자기한 풍경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명품과 같은 외국 브랜드가 입점할 때도 각 브랜드의 간판을 강조하면서 어떻게든 튀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 미코노스만이 가진 분위기 속에 녹아있는 듯, 이 섬의 문화와 풍경을 받아들이면서 브랜드로서 존재감을 내세운 태도가 좋아 보입니다.
이곳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예배당
또 다른 예배당
여기도 또 다른 예배당
어쩌면 미코노스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예배당. 이 섬에만 400여 곳이 있다고 하니 그리스인들의 종교관이 얼마나 투철하고 깊은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리스인의 98%가 그리스 정교회라는 독립된 종교를 믿습니다. 그리스 정교회라고 해서 반드시 그리스에서만 믿는 종교는 아니라고 합니다. 외교부 자료에 의하면, 그리스 문화권 내에서 자라나고 선교 되었다는 의미에서 그리스 정교회라 부르며, 여기에 각 나라의 명칭이 붙으면서 러시아 정교회나 루마니아 정교회, 불가리아 정교회가 되는 독립된 한나라의 종교라고 합니다.
뿌리는 가톨릭과 같아서 기독교의 한 교파로 봅니다만, 395년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되면서 기독교회도 갈라졌고, 그러다 서로 전통성을 주장하면서 대립하기 시작, 정파적인 이해관계로 갈라진 것으로 봅니다. 그리스 정교회는 가톨릭처럼 바티칸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그런 통괄 조직 없이, 각 나라가 독립된 조직을 이끌면서 민초에 뿌리를 두고 발전한 서민 종교라는 점.
그래서인지 그리스에서 본 예배당은 웅장한 규모나 화려함을 내세우기보다는 작고 아담한 곳이 많았습니다. 그야말로 서민 종교라는 것이죠. 실제로 들어가 보면, 종교관이 없는 분들도 성스러운 마음이 생겨날 것 같은 진중함이 보인다랄까요. 속사정을 뜯어보면 이들 교회도 나름의 고충과 갈등이 있겠지만,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모습에서는 속세에 얽매여 대립하고 갈등하고 경쟁하는 우리네 기독교와 달라도 한참 달라보입니다. 게다가 교회 자체가 미코노스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건축물이고 볼거리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특유의 조화로움과 통일감이 부럽게 다가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화단에 걸어 놓은 빨래마저도 사랑스러운 미코노스여
여기서부터는 관광객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주택가입니다. 이곳에 상주하는 주민들이 사는 집이죠. 그런데 관광지라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은 이 분위기는 대체 어디서부터 새어 나오는 걸까요?
호라 마을의 한적한 주택가
마치 자석에 이끌린 듯 저의 발걸음은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더 들어가면 돌이킬 수 없다 하더라도 이미 몸이 반응해 움직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때로는 호기심이 발동한 어린 아이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떨 땐 시골에서 도시로 상경한 사람처럼 두리번두리번 거리며 좀 더 깊숙이~ 더~ 더~ 를 되뇌면서, 지금부터는 달동네 느낌이 나는 계단을 밟고 올라갑니다. 끝까지 올라가면 뭐라도 나오지 않겠냐면서..
올라왔더니 뜻밖에 펼쳐진 조망이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이대로 좀 더 올라가면 왠지 더 좋은 사진 포인트가 나올 것만 같습니다. 역시 주택가를 끼고 올라온 건 잘한 선택이야~라고 스스로 칭찬하면서, 이제부터는 호텔이나 상점 하나 없는 미코노스 주민들의 삶의 터전으로 잠시 들어가 봅니다.
오르막길이지만, 걸을 맛이 났던 길
저 멀리 대형 페리들이 정박한 뉴포트가 보인다
미코노스의 올드 포트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언덕
3일 내내 비와 번개가 칠 것이라는 예보가 있었는지도 모를 날씨
가끔은 오보가 이렇게 큰 기쁨과 희열을 줄 수 있음을 알게 해준 이번 그리스 미코노스 여행.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는지 어디 여행이나 낚시만 갔다 하면, 날씨 복이 따라주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3일 내내 비와 천둥 번개가 칠 것이라며, 잔뜩 겁을 준 야후 날씨 앱에 감사의 인사를 ^^;
그 미로 같았던 골목길도 위에서 바라보니 별것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방향 감각만 잃지 않는다면, 숙소든 어디든 무리 없이 찾아갈 것 같은 기분. 하지만 막상 저곳에 들어가면 한없이 작아지는 내 모습을 발견하곤 하지요.
주택가만 있는 줄 알았던 이곳에도 꽤 괜찮아 보이는 호텔이 있었네요. 올드포트까지는 내려갔다 올라가기를 반복하며, 운동 좀 해야 할 위치지만 말입니다. 이제 호텔을 끼고 내려가 봅니다.
미코노스 원주민의 주택과 아이들
이곳을 돌다 보면 이런 갈림길을 심심찮게 봅니다. 골목길에서 마주친 갈림길은 마치 인생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는 나 자신을 보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종착지가 달라질 수 있어 늘 신중해야 했지만, 지금은 그런 고민 없이 몸이 반응하는 대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작고 소소한 묘미를 만끽해 봅니다.
골목길을 쭉 따라 들어오자 이런 장면과 맞닥트립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사진을 건질 때면, 갈림길에서의 선택이 옳았음에 작은 쾌감을 느끼곤 합니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과는 달리 호라 마을은 어딜 가더라도 예쁘고 아기자기한 세상이 펼쳐져 있어 갈림길에서의 선택은 무의미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든 생각은 하루를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선택의 기로에 시달리는가 하는 거였습니다.
선택이라는 이 작고 티끌 같은 고뇌가 쌓이고 쌓이면서 우리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선택의 무의미함이 주는 여유와 이곳에서의 '헤맴'이 각별했던 것 곳. "대충 갑시다. 방향은 잊으세요. 어딜 가더라도 결과는 비슷비슷할 겁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미코노스의 골목길은 헤매면 헤맬수록 힐링이 되어준 곳으로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그건 그렇고 저 나무말입니다. 국내 도입 좀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우리나라에는 2~3주 피다 지는 꽃들이 많아서 저런 꽃나무가 부럽더군요. 하기야 흰색 페인트칠을 한 건물과 함께 있어야 어울릴 테니 국내에 가져온다 한들 이 같은 분위기는 나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요즘 국내 건축계에서 뜬금없이 미코노스(?)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그리스는 독자적으로 섬과 마을 풍경을 만들었는데 그걸 국내에서는 따라 하기 바쁘죠. 제대로 따라한 것도 아닙니다. 조감도를 보면서 실소를 금치 못했는데요. 제주 애월의 미코노스 마을과 선재도의 미코노스 마을이 그렇습니다.
한마디만 할게요. 이곳과는 전혀 비슷하지 않아요. 어설피 흉내만 내고 이름만 같다 붙여 개성도 정체성도 없는 타운 조성은 이제 좀 그만할 때도 되었는데 말입니다. 우리만이 가진 독특한 정서와 분위기를 살려도 될 판에 굳이 외국 걸 가져놔서야. ㅠㅠ
은행마저 미코노스답구나
다시 올트 포트 근처로 내려왔습니다. 브런치 시간이라 레스토랑에 한둘씩 손님이 차기 시작합니다. 아마 조식을 제공하지 않는 저렴한 숙소 투숙객들이 느지막이 일어나 첫 끼니를 때우는 듯한 풍경입니다. 이날은 우리 가족 모두가 일찍 일어나는 바람에 하루를 길게 쓰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곳곳을 둘러보며 좀 더 많은 이야깃거리를 담아올 줄 알았는데요. 미코노스에서의 여행 이야기는 다음 편이 마지막이 될 것 같습니다.
내용을 압축해서 올리려는 것도 있지만, 실은 이날 아침에 사고가 났습니다. 그 사고로 인해 저의 하루 계획이 모조리 날아갔죠. 아침부터 저녁까지 미코노스에서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요? 사고 이야기와 함께 이 내용은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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