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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한라산에서 본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한 줄" 에 이어 오늘은 한라산 종주에 대한 낚시꾼의 보고서입니다. 사실 저는 등산을 무슨 재미로 하는지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고등학교 때 설악산도 가보고 속리산에도 가 봤지만 그냥 젊은 혈기로만 올랐을 뿐, 산을 이해하고 등산을 즐기는 개념은 없었죠. 그리고 세월이 흐른 지금은 바다낚시가 주된 취미가 되어버렸고, 바다보다 산을 좋아하는 아내의 등쌀에 못이겨 일년에 2회 정도만 등산을 하는 실정이랍니다.
그런 제가 제주도에서 장기 숙박을 하며 지낸지 한달째, 꼭 해야 할 숙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한라산 종주였죠. 저는 한라산을 오르기 전 예행연습을 한다며 해발 300m도 안되는 '저지오름'을 올랐는데 그 날 따라 몸이 너무 힘들어 골골대며 내려와 숙소에서 뻗었던 적이 있습니다. 아직 수능도 치르지 않았는데 모의고사부터 낙방하는 꼴이지요.
"이 저질 체력으로 한라산을 오르겠다고? 저기 제주도 바다에 사는 용왕님이 웃겠다 풉"
그리고 결전의 날이 왔습니다. 그것은 제 평생 염원도 아니고, 굳이 가지 않아도 될 산임에도 아내 손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가야만 했던 한라산 종주였습니다.
한라산의 가을 단풍, 성판악 코스에서
꿈에 그리던 한라산 종주!!! 가 아니고 꿈에서만 하고 싶었던 한라산 종주의 날. 이 날은 제 이웃 블로거이자 제주도 현지민이신 '파OO'님과 함께 하였습니다. 이틀전 해발 300m도 안되는 저지오름을 올랐다 심신이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와 뻗었다고 말하자 '파OO'님은 걱정부터 들었다고 합니다.
"해발 300m짜리에도 헉헉대는 이 등산 초짜를 어떻게 이끌고 한라산 종주를 해야 할까?"
흔히 알려진 한라산 등반 쉬운 코스로는 '성판악'에서 출발하는 것. 관음사 코스에 비해 비교적 완만한 능선을 타고 올라가기에 등산 초보자들도 크게 무리없이 올라갈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갔던 길을 다시 되돌아 오기엔 지루한 감이 있어 내려올 땐 다소 가파른 코스인 '관음사'를 택했었죠. 이들 코스의 총 합산을 살펴보니..
성판악 코스 9.6km
관음사 코스 8.7km
해발고도 1,950m
총 18.3km를 배낭을 짊어지고 풀프레임 카메라를 어깨에 맨 채 오른다 생각하니 좀 끔찍하였습니다. 군대에서 25km행군 이후 거의 처음해 보는 종주이기에 평소 운동을 안한 것이 걱정되고요. 그런 우리를 한라산 코스로 인솔해야 할 '파OO'님도 갑갑하긴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렇게 떠난 한라산 등반은 가을 단풍이 우릴 반겨주며 상기된 표정을 누그러트려 줍니다.
가을이 깊어가는 길목에서, 한라산 국립공원
이어지는 삼나무 숲, 한라산 등반 쉬운 코스인 성판악에서
'조릿대'로 우거진 한라산 등반코스를 한동안 오르다 보니 어느새 삼나무 숲이 우릴 반깁니다. 벌써 3km가까이 걸었지만 아직까진 괜찮습니다. 가을 단풍과 삼나무 숲등 변화무쌍한 모습이 좋았고 무엇보다도 인상 깊었던 점은 탐방객들을 위한 곳곳의 배려였습니다. 휴게소, 화장실, 그리고 나무로 된 계단등이 그것이지요.
전에 북한산도 가봤지만 그곳과 한라산 등반 코스가 다른 점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무로 된 계단을 박아 등산객들의 발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점입니다. 아무래도 들쭉날쭉한 자연석을 밟고 올라가는 것 보단 나무로 된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게 발의 피로도에서 적잖은 차이를 보이겠지요.
비록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계단을 정상까지 박아놓은 것이라 볼 수도 있지만 탐방로에 이러한 계단이 있음으로써 등산객들이 다른 숲길로 새는 것을 방지하고 오로지 한 길로만 가게 한다는 점에서 본다면 이것이 산을 보호하는데는 훨씬 긍정적일 것입니다.
2/3지점을 통과하며, 한라산 국립공원
처음엔 등산이라고 하기엔 민망할 정도의 완만함에 산을 대하는 태도 또한 부담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2/3지점에 있는 휴게소에서 라면과 김밥을 먹고 출발 할 때는 체력이 쉽사리 회복되지 않음을 느꼈습니다.
"몸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잠시 쉬어간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매운 입을 달래기 위해 찬 물을 마셔도 그때 뿐인 것처럼, 잠시 쉬어간다고 해서 체력회복이 쉽사리 되지는 않았던 거죠. 계속 오르나 잠시 쉬었다 오르나 다리 근육이 뻐근한건 마찬가지. 처음 시작했을 때의 가벼웠던 몸상태가 그리워지는 순간입니다.
이윽고 퍼지는 사람이 속출하기도 합니다. "내도 운동을 안하는 편이지만 저 분은 어지간히 안했나 보네" 어떤 이들은 퍼져서 움직일 수 없는 일행의 등을 두들기며 독려하고 있지만 이미 그 분의 표정에는 '포기'가 보이는 듯 합니다.
이제 남은 거리는 약 1.5km, 별거 아닌 거리 같지만 한라산 정상을 앞두고 경사가 가장 가파른 구간이 남았습니다. 평소 운동을 안한 이들에겐 재앙의 코스나 다름없지요. 소요시간은 1시간 30분이지만 쉬엄쉬엄 올라가면 2시간 가량이 걸립니다. 그 시간마저 지나면 정상에 오른 등산객들을 빨리 하선시키기 위해 통제한다고 하니 모르긴 몰라도 2/3지점까지만 밟고 내려가는 분도 계실듯 합니다.
어느덧 한라산 정상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한다
한라산 정상엔 헬기가 공사자재를 나르고 있었고, 그곳을 향한 행렬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해발 1,950m의 한라산 정상이 코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위로는 더 이상 오를 길이 없는 마지막 길이였습니다.
멀리 사라오름이 보이는 한라산 풍경
주말을 맞아 엄청난 수의 탐방객들이 한라산 백록담을 찾았다
정상 곳곳엔 태풍 피해로 날라간 탐방로를 보수중이다
한라산 정상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며 즐거워 하는 등산객들
그래도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인데 이 저질 체력으로 용케도 올라왔군요.^^ 우리부부도 한라산 정상에서 기념사진을 찍어봅니다.
매말라 버린 한라산 정상의 백록담
이 날 한라산 종주를 위해 준비해 주신 폴대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사실 생각보다는 힘들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가뿐하게 올라온 것도 아닌거 같습니다. 해발이 1,950m라 하여 그것을 전부 오르는 것도 아니고(이미 성판악 코스 입구에서 40%는 먹고 들어갔으니) 예전에 북한산 최고봉인 백운대를 올라봤기에 그때의 체력적 부담을 지금의 한라산과 비교해 본다면 오히려 한라산이 쉬운 것 같습니다.
거리는 좀 더 길지만 아무래도 완만한 능선이 저에겐 잘 맞았던 것도 같고요. 무엇보다도 저 폴대가 있었기에 힘이 많이 분산된거 같습니다. 등산객들이 왜 폴대를 들고 다니는지 이해가 갔습니다.
하지만 막상 정상에 올라와 보니 구름과 안개가 잔뜩 끼어서 기대했던 제주도의 시원한 풍경은 볼 수 없어 아쉬웠습니다.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정상에서의 풍경은 그렇게 불발로 그쳤고 주말에 너무 몰린 등산객과 공사로 인해 어수선함도 있었습니다.
한라산 정상에서 맛보는 초콜릿과 황금향
백록담에 사는 한라산 메뚜기
고사목이 즐비해 독특한 풍경을 내고 있는 관음사 코스
독특한 풍경이 압권인 관음사의 하선길, 한라산 국립공원
성판악 코스는 뭔가 아기자기 하면서도 여성적 이미지가 많았던 점에 비해 관음사 코스는 허연 고사목과 시원한 절경으로 다소 남성적인 이미지를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내려오면서 드는 생각은 얼마전 형제섬에서 쉬지 않고 했었던 12시간 낚시.
새벽 6시부터 시작된 낚시는 오후 6시가 되서야 끝이 났는데 중간에 물 한 모금 안마시고 땅에 엉덩이 한번 대지 않으며 전투낚시를 치뤘던 것과 비교해 보니, 아직까지는 "12시간 식음전폐 낚시"가 좀 더 힘들었다였고 그것은 아내의 생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디까지나 심리적인 측면이고 체력적으로만 따지자면 그래도 낚시가 등산을 따라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등산이 낚시보다 좋았던 점은 고기를 잡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없어 심리적으로 무척 편했다는 것입니다.
분화구의 한쪽 능선이 시원하게 뻗어 있고 그것을 배경으로 하선길에 오른 탐방객들
태풍에 뿌리채 뽑힌 나무, 한라산 관음사 등반 코스에서
'청산가리' 조기축구 유니폼에 빵 터졌다 ^^
관음사 코스는 매우 가파랐습니다. 강한 남성적이미지가 느껴지는 풍경에 기본적인 경사각이 있어 산행에 요령이 없는 초심자가 동반하기엔 꽤나 힘들어 보이는 코스같습니다. 그나마 지금은 하선 중이여서 내려가 볼만 했지만 이 각도 그대로 오른다 생각하니 정신이 혼미해지는군요.^^;
개인적인 생각으로 추천하는 한라산 등반 코스로는 성판악을 통해 등반을 하고 관음사 코스로 하선하는 길입니다.
산을 오르내리며 필요한 물품을 실어나르는 레일
관음사 코스에서 바라본 왕관바위, 한라산 국립공원
하선을 마치고 멀리서 바라본 한라산 정상
그야말로 온몸이 후들거리는 등반이였습니다. 이틀전 해발 300m도 안되는 저지오름길은 분명 컨디션이 안좋아 일찍 지쳐버렸고, 이 날은 전날부터 컨디션 조절에 신경을 썼기 때문에(낚시를 안했음)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한라산 종주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저 멀리 보이는 정상을 다녀왔다고 생각하니 스스로도 놀랍고 신기하네요.^^ 아직 체력이 죽지는 않았나 봅니다.
이후 어깨와 종아리에 벤 알이 자그마치 3일은 가더군요. 다행히도 가만히 서 있어야 하는 낚시엔 지장을 주지 않았지만 계단을 오르내릴 땐 절음발이가 되었답니다. 어쨌든 한라산을 다녀오고 나니 뭔가 큰 숙제를 했다는 뿌듯함이 느껴졌답니다. 이상하게 한번 갔던 산은 또 다시 오르고 싶지 않았는데요.
한라산 만큼은 나중에 등산객이 몰리지 않은 평일을 택해 한번 더 오르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때는 백록담에 물이 많이 차있고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제주도의 비경이 활짝 열리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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