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정육식당에서 맛으로 감동받은 이유 


 

이곳은 강원도 고성으로 촬영차 취재진들과 함께 들렀던 곳.

밤늦은 시간이라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미시령 고개를 넘어 고성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토성면입니다.

외관상으로 보아 등심이나 삼겹살을 파는 흔하디흔한 정육 식당이니 대충 저녁이나 때울 생각으로 들어갔습니다.

삼겹살 4인분을 시키고 앉아 있는데 뚝배기에 계란찜이 수북이 담겨 넘칠 듯 말듯 아슬아슬하게 내어옵니다. 사전에 입가심하기 좋네요.

전에 유행했던 부풀어 오르는 계란찜이라 질감도 매우 부들부들합니다. 여기까지는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많은 찬은 아니지만, 일제히 깔리면서 고기가 나옵니다. 1인 12,000원 정도 했던 것 같은데 말 그대로 생고기네요.

흔히 냉동을 해동해 놓고 생고기라 파는 것이 아닌 썰기 위해 살짝 냉을 받쳐놓은 수준의 생고기 말입니다.

질도 괜찮고 살코기 비율도 좋지만, 제가 이 집에서 맛으로 감동한 건 삼겹살이 아니었습니다. 이 정도 삼겹살은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으니까요.

길쭉하게 썰린 김치를 보는데 빛깔이 예사롭지 않네요. 흔히 보던 중국산 김치의 벌그스레함도 없었고 공장에서 국산 반 중국산 반 고춧가루로 버무려져

찍어 낸 느낌도 아니었습니다.

 

맛을 보는데 순간 눈이 번쩍 뜨입니다. 김치가 익어서 내는 신맛의 조화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 건지.

"김치 지데로다."이 말이 절로 나올 만큼 발효의 깊은 신맛과 배추의 아삭함이 더해지니 밥도 밥이지만, 막걸리 한 잔 간절히 생각나는군요.

궁금함을 참다못한 저는 사장님께 물었습니다.

 

"김치 어디서 가져다 쓰세요?"

"저희가 직접 담그고 있습니다."

"어쩐지.. 빛깔이 예사롭지 않다 싶었는데.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일일이 담아서 팔면 힘들지 않아요?"

"그래도 직접 담가야 맛이 좋아서"

 

이렇게 김치를 손수 담가서 쓰는 식당은 실로 오랜만에 보는군요. 고춧가루도 오로지 국내산만 사용한답니다.

아시겠지만, 중국산 고춧가루는 국내산보다 2~3배가량 가격이 저렴합니다. 그만큼 품질도 떨어지지만 식당에서는 값비싼 국산 고춧가루를 대체하기에

이보다 좋은 것은 없으니 대부분 사용하고 있지요. 아마도 우리가 먹는 외식에서 중국산 김치가 차지하는 비율이 80% 이상은 족히 될 것입니다.

그 정도로 우리의 김치는 중국의 막대한 자본력에 잠식되고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고춧가루만 가져다 쓰는 것도 아닙니다.

이제는 중국에서 버무린 김치 속 양념(다데기)이 아예 만들어진 채로 들어오기 때문에 국내 김치 공장에서는 배추에다 버무려 대량으로 찍어내기만 하면

됩니다. 유통기간도 짧고 빨리빨리 소비가 이뤄져야 하기에 발효에 의한 신맛이 아닌 식초에 의한 신맛에 모두가 똑같은 김치만을 내놓고 있는 거죠.

 

이는 김치의 개성을 잃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식당으로 나가면 배추만큼은 국내산이니까 원산지를 국내산으로 표기해 놓고 팝니다. 

소비자들은 이런 부분에 무심합니다. 알아도 원산지 표기가 그러하니 당연히 그런 줄로만 알고 먹는 거죠.

법이 허술하니 서민 먹거리가 망가지는 것이며 대자본에 잠식돼 개성을 잃어버린 음식이 계속해서 속출하는 것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근 식당 원산지 표기법에서 배추 따로 고춧가루 따로 표기하도록 한 점입니다.

이렇듯 좋은 재료를 쓰는 식당이 그렇지 못한 식당에 가려지지 않도록 법이 계속해서 발전해 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와 동시에 소비자들도 좋은 음식을 알아보는 안목을 높여야겠지요.

 

사장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뭐든 직접 만들지 않으면 맛에 성에 차지 않아 보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김치를 직접 담근다는 말이 도리어 안타깝게 들리더군요. 만약, 공급처가 있었다면, 제가 집에서 주문해 먹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김치는 금방 동났고 이후 두 번이나 리필해 먹었더니 사장님은 김치 값 받아야겠다며 농담을 던지시네요. ^^

 

사실 제 인생에서 감동적인 맛으로 다가온 김치는 몇 안 되었습니다. 

당장 생각나는 것을 꼽으라면 작은 고모님께서 담가 주셨던 서울식 김치, 전라도 어느 식당에서 맛본 전라도식 김치 정도였죠.

여기에 강원도에서 맛본 이 집 김치가 맛의 기억에 새로이 추가될 듯하네요. 만약, 이 집에서 김치를 맛보고 아무 생각 없이 넘기셨다면 그 사람은

좋은 음식을 알아보는 수완이 없거나 혹은 먹는 것에 관심이 없거나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김치가 맛있으니 다른 밑반찬에도 관심이 쏠렸습니다. 요즘 고깃집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명이나물 장아찌.

과거에는 울릉도 특산으로 귀히 여겼지만, 지금은 마트, 반찬가게 할 것 없이 흔히 보이고 도심지의 고깃집에서도 종종 봅니다.

먹어보면 울릉도에서 맛본 그 맛이 나질 않습니다. 발효에 의한 개운한 신맛이 아닌 텁텁한 간장 맛이 나는데 공장에서 받아쓰는 게 문제는 아니겠죠.

시간 싸움에 회전율을 높이다 보니 엉터리로 만들어 내다 파는 게 문제겠지요.

그런데 이 집 명이나물은 울릉도에서 맛본 그 맛이 나네요. 명이 특유의 쫄깃한 식감이 살아 있었고 장아찌가 제대로 익은 맛이 납니다.

 

평소 손대지 않은 파절임을 먹어봅니다. 조금 과하게 시큼합니다. 시큼함 속에서 양념의 균형이 절묘합니다.

계란찜이며 장아찌며 보잘것없는 파절임까지 이 집 안주인의 솜씨가 반찬 맛을 평균 이상으로 끌어올린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 머리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된장찌개였습니다. 한술 뜨는데 역시 일반 고깃집에서 내는 된장과는 국물의 깊이가 달랐습니다.

그 저렴한 멸치 다시다의 맛이 아닌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깊은 맛. 그 맛은 제가 집에서 내는 멸치 육수보다도 더욱 깊었으니 이쯤에서 육수 내는 방법이

궁금해 물었습니다. 날아오는 답변도 보통이 아니로군요.

 

"자연산 다시마와 표고로 국물을 냈습니다."

 

 

이날은 애초에 촬영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카메라 전원 버튼을 꺼두었습니다.

그러다가 음식이 좋아 뒤늦게 찍었는데 너무 늦어버렸네요. 그래도 맛있게 먹었음을 이 사진으로나마 대신하고자 합니다.

오늘날 '맛집'은 많이 변질됐지만, 제 마음속의 맛집은 이렇게 불현듯 다가오기도 합니다.

이날 처음으로 고깃집에 (카메라) 전원 버튼을 누르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했습니다.

그래도 모처럼 맛있는 김치, 명이 장아찌, 된장찌개를 맛볼 수 있어 참으로 기분 좋은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사장님 건승하십시오.

 

※ 추신

제대로 된 포스팅조차 없는 이 집이 소문나버려 손님들이 김치만 달라고 한다면, 사장님은 이 글을 원망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적당히 찾아가시고 적당히 드시옵서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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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입질의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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