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앞에 한 생선이 놓였습니다. 도마를 훌쩍 덮는 두툼한 살점과 순백의 흰 살.

 

 

뒤집으니 철갑을 두른 느낌입니다. 혹시 철갑상어일까요? 세계 3대 진미 중 하나인 캐비어(철갑상어의 알)만 보더라도 너무 맛있어서 남획이 우려되지만, 아직은 멸종 위기에 이를 만큼 심각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국내를 비롯해 세계 각지에서 양식되고 있으니..

 

 

한 조각에 불과한데도 크기가 엄청납니다. 요즘 한창 인기를 구가하는 대방어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크기입니다. 다 자라면 몸길이 3m에 무게만도 100kg에 이른다니 사진의 것도 완연한 성체는 아니며, 토막 난 조각에 불과하니 이 녀석이 얼마나 큰지도 가늠하기 어렵죠. 이 고기의 정체는 무얼까요?

 

 

<사진 1> 표준명 비막치어(일명 메로), 출처 https://lastocean.wordpress.com/

 

#. 어쩌면 절멸될지도 모를 비운의 생선

너무 맛있어서 멸종 위기인 비운의 생선, 바로 비막치어입니다. 비막치어란 이름은 생소하지만. '메로'라고 하면 참치 집에서 먹던 바로 그 생선구이를 떠올릴 것입니다.

 

비막치어는 수온 0도에서 3도에 이르는 얼음장 같은 환경에 서식하지만, 특이하게도 북극해에는 서식하지 않습니다. 모두 남극 해류의 영향이 미치는 칠레 및 아르헨티나 남부를 비롯해 뉴질랜드 남부 및 남아공 남부 등 남극대륙 근처에만 서식하며, 햇빛이 닿지 않은 수심 80m~2,000m의 심해에 사는 심해어입니다.

 

차디찬 물속, 깊은 수심에서만 서식하는 탓에 성장 속도가 느린 대신 수명은 50년으로 추정, 더욱이 매년 산란하지 않는 취약한 번식 능력과 남획이 맞물리면서 지금은 보호 지정 턱 밑까지 올라왔습니다. 아직은 조업할 개체 수가 남아 있어서 이를 토대로 '남극 해양생물 자원 보전위원회(CCAMLR)'가 매우 엄격하고 까다롭게 조업량을 할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법 조업만 아니라면 우리가 먹는 메로는 대부분 합법적으로 유통되는 것입니다.

 

 

비막치어(메로)의 대표적인 조업 구역 중 하나인 마젤란 해협(칠레, 아르헨티나)

 

#. '메로'란 말의 유래

메로를 칭하는 이름은 다양합니다. 국명은 비막치어이며, 영어권에서는 파타고니아 인근 해역에서 잡힌다고 하여 '파타고니아 이빨고기(Patagonian Toothfish)'라 부르고, 미국에서는 단순히 부르기 쉽게 '칠레 농어'라 부릅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메로가 일본명이 아니며, 일본 표준명으로는 '마제란 아이나메(マジェランアイナメ)'. 즉, 마젤란 해협에서 잡힌 '아이나메'란 것입니다.

 

 

<사진 2> 비막치어를 닮은 표준명 쥐노래미(일명 놀래미)

 

아이나메는 우리 말로 '쥐노래미'를 뜻합니다. 동네 횟집에서 흔히 보는 '놀래미'가 바로 표준명 쥐노래미인데요. 아마도 비막치어가 쥐노래미를 닮아서 붙인 이름이 아닐까 추정해 봅니다. 

 

그렇다면 '메로(メロ)'는 어디서 유래된 말일까요? 사실 메로란 단어는 일본에서도 사용하지 않는 국적 불명의 명칭입니다. 다만, 일본의 수산시장에서는 흰살생선을 통틀어 '멜로'라 부르는 경향이 있고, 순백의 흰살을 가진 비막치어야 말로 멜로라 부르기 적합한 생선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30년 전에는 토막 낸 비막치어를 다금바리로 속여 팔다가 적발된 적도 있었죠.

 

그런데 이러한 사실과는 별개로 스페인에서는 멜로를 '그루퍼(Grouper)'라 불리는 어류의 총칭으로 씁니다. 우리가 없어서 못 먹는 횟감인 '다금바리', '붉바리', '능성어'도 모두 그루퍼란 분류에 속하며 국명으로는 '바리'란 말이 붙죠. 칠레에서는 비막치어를 농어나 바리과의 일종으로 생각했을 것이고 그것을 단순히 멜로라 부르게 된 것인데우리가 메로로 부르게 된 것이 스페인의 멜로에서 유래된 것인지, 혹은 흰살생선을 뜻하는 일본의 멜로에서 유래된 것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사진 1>과 <사진 2>에서 볼 수 있듯이 비막치어(메로)겉모습은 쥐노래미와 유사한데 어류 분류상으로는 '농어목 남극암치과'라는 독특한 분류에 해당합니다. 이 남극암치과를 우리말로 번역했더니 비막치어라 나오는데요. 아무리 자어를 살펴도 '비막'이라는 부분과 남극암치의 연관성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시장에서도 '비막치어'란 이름으로 취급하지는 않죠. 보통은 메로로 불립니다. 그러므로 해당 이름을 작명한 국립수산과학원에서는 이 어종을 비막치어란 이름으로 지은 이유에 관한 설명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더불어 현재 아프리카에서 수입되는 조기와 수조기를 각각 '긴가이석태'와 '영상가이석태'라 명명한 것도 설명이나 관련성을 찾기 어렵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자주 먹는 생선 이름들이 알고 보면, 우리네 실생활과 동떨어진 작명인 사례가 매우 많습니다.

 

 

표준명 기름갈치꼬치(일명 기름치)

 

#. 값비싼 메로로 둔갑하는 대표적인 생선

한때 기름치라는 이름으로 명성을 날린 생선이 있습니다. 배탈을 일으키는 '왁스 에스테르'를 다량 함유하고 있어 이를 과다 섭취하면 급성 복통과 설사, 식중독을 유발하지만, 메로와 흡사하게 생겨 메로로 자주 둔갑하기도 했죠. 저가 참치 집에서는 일명 '백마구로'라는 얼토당토 않한 이름으로 판매되기도 했습니다.

 

일본에서는 기름치를 1970년부터 식용을 금했고, 우리나라는 뒤늦게서야 문제점을 인식해 2012년부터 수입과 판매를 금지했지만, 주변에 들리는 말을 종합해 보면, 밀수든 뭐든 법의 허점을 이용해 암암리에 유통될 가능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사르르 녹으면서 고소한 풍미가 백미인 메로구이

 

오늘날 비막치어(메로)는 엄격한 어업 규정에 따라 조업되고 있어 유통량은 많지 않지만, 찾는 수요는 한국과 일본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늘고 있어 문제입니다. 번식력이 약한 데다 멸종 위기 직전에 몰려 엄격하게 관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원양어선 시장이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찾게 되는 고급스러운 맛과 풍미, 메로만이 가지는 시장성(가치) 때문이겠지요.

 

국내 시장이 그리 크지는 않지만, 메로는 맛을 아는 미식가들이 알음알음 찾아 먹는 식재료로 참치를 취급하는 쇼핑몰이나, 냉동 어육을 판매하는 수산시장에서 어렵지 않게 구입할 수 있습니다. 글을 쓰는 저도 이 겨울에 메로구이와 따듯하게 데운 청주 한 잔이 그립지만, 맛과 합법적 유통이라는 자기 합리화로 수요에 은근슬쩍 동참해야 할지, 혹은 절멸 위기에 놓인 생선을 굳이 사 먹어야 할지에 대한 갈등이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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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입질의 추억 ★입질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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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운태
    2018.01.30 10:54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엄청 고급 생선이죠.
    정말 요새처럼 추울때는 메로구이에 따끈한 청주 한잔 생각나네요.

    입질님 앞에 저 큰 토막이 있다는 겁니까? 헉... 부럽다.
  2. 안녕
    2018.01.30 21:18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정말 좋은글 감사합니다. 궁금한게 있는데 적어주신 기름치가 황새치와는 다른 생선인가요?
    • 2018.01.30 21:53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네 완전히 다른 생선입니다 ^^;
    • 2018.02.14 07:36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기름치는 smith's escolar라고 하며 몸이 검고 참치와 비슷하게 꼬리쪽에 토막지느러미 같은게 보여 살이 희고 기름지고 참치닮았다고 기름치라고 했는데, 다랑어가 아닙니다. 황새치는 Swordfish라고 해서 윗주둥이가 뾰족하게 나와잇고 배지느러미가 없습니다. 사진찾아보시면 차이를 볼수있습니다.
  3. 2018.02.14 07:31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비막치어라고 국명을 명명하실때 파타고니아를 한자로 비막이라고 불러서, 파타고니아(비막)이빨(치)고기(어)라고 하셨다고 하네요. 이빨고기는 두 종으로 파타고니아이빨고기, 남극이빨고기가 있고 사진 올리신 고기는 남극이빨고기 같네요. 이빨고기자체가 올림픽식 쿼터할당에 규제에 이래서 비싸죠. 몸통만 톤당 2만불이니... 우리나라는 거의 턱살 정도만 국내로 들어오고 대부분은 미국으로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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