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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 30분, 고흥 외나로도
평도에서 12시간짜리 비박 낚시를 하고 온 저는 펜션에 여정을 풀고 샤워부터 합니다. 잠시 누워서 쉬고 있자니 몸이 노곤하네요. 이때 최필님이 말합니다.
"형님, 지금 민어 낚시 간다는데 어떡하실 거예요?"
밤 꼬박 세며 낚시했는데도 젊어서 그런지 체력이 넘치나 보군요. (꼭 몇 년 전의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은 ^^) 시간은 오후 4시. 이대로 펜션에 투숙하기에는 어중간한 시간입니다. 몸은 천근만근 무겁고,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가야죠. 제가 별수 있나요? 여기서 쉬느니 나가서 뭐라도 잡아야 사진도 건지고, 자료도 확보하고, 뜯고, 먹고, 지지고 하겠죠.
저와 최필님은 12시간 비박 낚시 + 강행군을 선택합니다. 항에 도착하자 지난 번 광도에서 농어낚시를 안내한 이성훈 선장이 반깁니다. 이번에는 고흥에서 대대로 전해지는 전통 민어낚시를 보여주겠다고 하네요. 순간 피곤하던 몸이 갑자기 말짱해지면서 나오길 잘했다 싶었죠.
고흥 앞바다에서 민어잡이에 열중인 배들
"그나저나 요즘 민어가 좀 나와요?"
"많은 마릿수는 아니지만, 간간이 나옵니다."
"씨알은 얼마나 돼요?"
"얼마 전에 10kg 넘는 것도 잡혔는데 보통은 5~6kg급이죠."
대충 이런 이야기가 오가면서 포인트로 향합니다.
고흥에서 사용하는 전통 민어 채비
이성훈 선장이 채비를 보여주는데요. 이것이 고흥에서 사용하는 전통 방식의 민어 채비랍니다. 그 이름은 검색조차 안 잡히는 '설레끼리'. 구조를 보면 약간 멍텅구리 낚시 같기도 합니다. 추 아래로 길이가 1발(1.5m)에 이르는 목줄과 외바늘이 달립니다. 때문에 추가 바닥을 찍으면 정확하게 1발(1.5m) + 20cm(편대 길이)를 올려 그 상태로 고정한 뒤 입질을 기다립니다.
농어(세이코) 바늘
마침 민어 바늘이 다 떨어져서 할 수 없이 농어바늘을 쓰는데요. 보시다시피 뒤틀림 하나 없는 일자 바늘이라 플라이어를 이용해 뒤틀림을 약간 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장점은 챔질 시 후킹 확률을 높인다는 것.
포인트에 도착하자 준비한 미끼를 보여주는데요.
양식 흰다리새우
이 근방 양식장에서 사 온 (활)흰다리새우입니다. 이날과 내일 이틀 동안 민어 낚시가 예정돼 있어서 이틀 치 분량을 준비했는데요. 살아있는 활새우라 미끼값이 만만치 않습니다. 하여간 비싼 것들은 미끼도 비싼 걸 먹어요. 다금바리도 그렇고, 돌돔도 그렇고..
참고로 새우를 꿸 때는 뇌가 다치지 않도록(뇌가 비쳐요.) 살짝 피해서 꿰는 것이 핵심. 잘만 꿰면 30분 이상 살아있습니다.
시간은 오후 5시
드디어 생애 첫 민어 낚시가 시작되었습니다.
"더도 말고 10kg, 아니 8kg짜리 민어만 한 마리 잡게 해주세요!"
라고 마음속으로 빌며, 고흥에서 전통적으로 쓰이는 줄낚시로 민어를 노립니다. 그런데 이때..
뭔가를 걸고 파이팅에 들어간 최필님
최필님으로부터 예기치 못한 입질이 들어옵니다. 톡톡거리는 모양새로 보아선 전형적인 쏨뱅이 입질인데 막상 걸고 나자 낚싯대가 고꾸라지는 것이 예삿놈은 아닙니다. 초반에는 딸려오는가 싶은데 중반에 이르자 기를 쓰고 달아나는 녀석. 그 힘을 차분히 받아내며 끌어올리는 최필님.
그나저나 어떤 놈일까요? 당연히 민어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수면에 모습을 드러낸 녀석은 뜻밖에도 시뻘겋습니다.
게다가 씨알까지 준수. 난생처음 잡아본 OOO에 현장은 흥분의 도가니가 돼버립니다.
40cm급 붉바리
그것은 바로 다금바리 사촌 붉바리. 전설의 물고기라 불릴 정도는 아니지만, 미식가들이 동경하는 최고급 횟감임에는 이견이 없을 겁니다. 붉바리는 농어목 바리과 어류로 제주도의 자바리, 일본 남단의 다금바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고급어종입니다. 바리과(그루퍼) 어류 중 크기가 가장 작으니, 이 정도면 준수한 씨알이라 할 수 있겠지요.
녀석이 죽을 수도 있어 촬영을 서두릅니다. 이성훈 선장의 피징(부레에 공기 빼기)을 끝으로 붉바리는 어창에 보관됩니다. 오후 4시에 시작한 낚시라 남은 시간이 촉박합니다. 앞으로 길어야 1시간 반인데요. 과연 이 시간 안에 민어를 볼 수 있을지..
그렇게 한동안은 여밭과 뻘밭을 오가며 민어를 노렸는데 아직 이렇다 할 입질이 없습니다. 중간에 제게 입질이 들어왔는데 '투둑' 하며 새우를 물어뜯는 느낌에 반사적으로 챔질했는데 벗겨지고 말았죠. 채비를 걷자 새우만 떼먹었습니다. 분명, 민어의 소행으로 여겨지고 있어 긴장됩니다.
왜냐하면, 제게 잡힐 민어가 5kg이 될지 10kg이 될지, 심지어 15kg짜리 대물이 걸릴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런 게 잡히면 인근 공판장에 내다 팔 겁니다. (낚시 재미 보고, 경비도 뽑고, 포스팅도 하고 일석 삼조 ^^;)
하지만 현실은 냉정한 법. 시간이 가면 갈수록 입질이 활발해질 줄 알았는데 어째 소강상태로 가는 듯합니다. 이성훈 선장의 이야기로는 민어 입질은 시간대와 상관없이 들어온다고 합니다. 시간대보다는 밀물과 썰물, 물돌이 타임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이성훈 선장이 극적으로 입질 받고 끌어올린다
시간은 오후 6시. 두 시간의 짧은 낚시를 끝으로 철수를 고민하는데 이때 이성훈 선장의 팔이 하늘로 솟구칩니다. 입질이 들어오자마자 팔을 번쩍 들어 채는 '줄낚시 챔질'이 이뤄지는 순간, 그의 팔은 바닷속 무언가의 힘에 이끌려 수면으로 떨어집니다. 순간 민어가 잡혔다 싶었죠.
실랑이도 잠시, 오랜 선장 경험에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능숙 능란한 솜씨로 끌어올리는 이 선장.
"촤~~~~~"
민어는 민언데 크기가 작으니 살찐 조기처럼 보이는데요. ^^;
2kg급 민어
활민어야 시장에서 종종 보지만, 이렇게 갓 잡힌 민어를 눈앞에서 보는 건 저도 처음입니다. 때깔 좀 보십시오.
과연 일반 사람에게 이걸 보여주었을 때 민어라고 알아맞히는 분들은 얼마나 있을까? 싶을 만큼 갓 잡힌 민어는 은백색 철갑을 두른 듯 귀공자 같은 자태를 뽐냅니다. 그래도 한통속은 못 속인다고, 조기와 같은 분류다 보니 조기가 연상되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이어서 최필님이 뭔가를 낚아 올리는데요. 이 뻘밭에서 웬 돌돔인가 싶었는데 돌돔이 아닙니다. (그나저나 바늘이 묘한 곳에 걸렸네요.)
표준명 군평선이(금풍생이, 딱돔, 샛서방고기)
서울, 수도권 사람들에게는 매우 생소한 물고기죠. 이름은 군평선이. 주산지는 여수, 고흥 일대로 이곳에서는 보통 딱돔, 금풍생이 정도로 부릅니다. 소금구이가 아주 일품인 녀석이죠.
전처리가 완료된 민어와 붉바리
2시간의 짧은 낚시를 끝으로 우리는 선장의 집으로 향합니다. 짧은 낚시에서 딱 보여줄 고기만 잡은 것 같아 여러모로 효율이 높습니다. 제 앞에는 여름 보양식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민어와 붉바리가 이제 막 전처리를 마치고 대기 중입니다. 슬슬 칼 솜씨를 발휘할 때가 왔네요.
먼저 민어 배를 제치는데 부레가 덩그러니.. 이 장면에서 이런 말하기는 뭣하지만, 그래도 군침이 돕니다. ^^;
낯선 주방, 낯선 칼이지만, 최대한 정성 들여 회를 떠봅니다.
갓 잡은 활 민어회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바닷속을 누비고 다녔을 민어가 지금은 해체된 채 젓가락질을 재촉합니다. 왼쪽에 보이는 뽀얀 민어 뱃살이 굉장히 먹음직스럽네요.
붉바리 회
모두 식탁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댕강댕강 썰었는데요. 아무래도 실수한 것 같습니다. 이제 막 사후경직에 들어간 붉바리를 칼이 잘 안 든다는 이유로 두껍게 썰어버렸는데 그 결과 턱 운동 좀 했습니다. ^^;
붉바리와 민어회가 나란히 놓인 100% 자연산 밥상
보기만 해도 건강해질 것 같은 상차림
점심때 삼겹살을 먹어서인지 생선회가 무척 당겼는데 민어와 붉바리가 덩그러니 놓인 밥상이라 감개무량합니다. 사실 제가 잡은 것도 아니고, 특별히 들인 노력도 없었는데 이렇게 쉽게 먹어도 되는지.. ㅎㅎ
이성훈 선장 댁은 전형적인 어부 집안입니다. 정갈하면서 토속적인 반찬과 함께 진귀한 회를 곁들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말입니다. 뭐랄까요? 맛을 떠나 정신적으로 힐링이 되고, 몸도 건강해지는 느낌입니다. 이날은 평도 갯바위에서 12시간 동안 비박 낚시를 했습니다. 바로 전날에는 서울에서 차 끌고 오느라 피곤했죠. 여태 잠도 못 자고 있었는데 이걸 먹었으니 잠 다 잔 것 같은 기분입니다. ^^;
민어 부레
소금장에 찍어 먹는 민어 부레. 지방질로 둘러싸인 표면은 몇 번 씹기도 전에 크림이 되어 녹아들고, 가운데 약간 질긴 심지는 입에 쩍쩍 붙으며 마치 찹쌀떡 같은 끈끈한 식감을 내어줍니다. 어찌 보면 독특하고, 어찌 보면 추잉검처럼 질겅거리죠.
민어회
어부식 밥상이라 회간장이나 고추냉이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빙초산을 몇 방울 떨어트린 어부식 초장에 찍어 먹는데요. 여름에 다소 느슨해진 미각을 깨우기에는 이것만큼 좋은 방법도 없을 겁니다. 꾸벅꾸벅 졸던 혀가 화들짝 깨네요.
푹 찍어 먹어도 좋고, 그냥 먹어도 좋은 민어와 붉바리 회. 같은 활 민어라도 스트레스 여부에 따라 맛과 식감이 달라지는데요. 시중에 판매되는 활 민어는 부레가 부풀어 몸이 뒤집힌 채 죽어가는 폐사 직전의 상태입니다. 가장 팔팔할 때 전처리한 이것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요. 그래서인지 식감이 보통이 아닙니다. 사각사각 씹히는 식감도 식감이지만, 이에 닿는 조직감이라든지 저항감이 "쏴라있네~" 정도의 표현이라면 얼추 어울리달까?
다음 날 새벽, 외나로도 선착장
다음 날 새벽입니다. 이날 민어 낚시를 끝으로 서울로 올라갑니다. 가족들에게는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민어회를 맛보여 주겠다."며 장담했는데요. 과연 민어 잡으러 갔다 빈손으로 올라갈지, 아니면 횟감 한 상자 싸 들고 올라가게 될지 기대가 됩니다. (다음 편 계속)
- 고흥 민어, 농어, 타이라바 문의
해덕호(010-5305-1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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